<주의 문구>
- ‼️등장하는 인물은 허구 및 성인이며, 실존 인물 혹은 사건과는 관련 없습니다. 또한 작중 사건, 지명, 회사명 등은 소설적 재미를 위해 창작된 가상의 설정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 ‼️현대AU(2026년이 배경) / 재벌공x까칠수 / 헤게 / 선계약 후연애 / 계약관계
- ‼️시작부터 오토바이 사고(...
- ‼️정대만이 미츠이 히사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만태섭이 기본이지만 동시에 미츠태섭 이기도 합니다.
<표현 안내>
- 기울여진 텍스트는 일본어입니다.

몸이 붕 떠올랐다.
눈부신 라임색으로 빛나는 바이크가 주인도 없이 홀로 바퀴를 굴린다. 쥐꼬리 같은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 살말 일억사천칠백번은 고민했을 거다. 아— 큰맘 먹고 산 내 바이크가 왜 혼자 궤도를 달리하고 있는 걸까? 튜닝도 못 해본 내 순정에 서글퍼져서 마음이 좀 그랬다.
여름 볕을 내뿜는 태양은 뭉게구름이 멋들어지게 피어난 하늘 가운데에 걸려 있었고. 마포대교 위, 버드나무가 울창한 밤섬을 지나 여의도로 진입하던 중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차선이 뒤바뀌더니, 끼익— 날카로운 브레이크 패드 소리와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났다.
눈앞에 펼쳐지는 기괴한 장면도, 시 분 초를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도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거스르는 듯했다. 형체가 일그러지다 못해 슬로우 모션으로 느려지는 것처럼. 뇌가 아득해지는 혼란함 속에서 태섭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바이저 너머를 바라만 봤다.
떠오른 몸이 도로 뒤집혔다.
눈앞의 세상이 파랗지 아니한 걸 보아하니, 지금 보고 있는 건 확실히 하늘이 아닌 듯하다. 이내 우우웅거리는 알 수 없는 소음이 쾅! 하는 굉음으로 이어졌고 아득히 어두워지는 시야에, 그대로 태섭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아홉수.
얼핏 보면 20대 초반 같아 보이는 송태섭에게, 몇 없는 친구 놈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했던 말이다. 아홉수에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라. 미리미리 액운 쫓아라 안 그럼 재수 좆 된다. 내가 여친이랑 헤어진 게 29살 때잖아. 어쩌구저쩌구. 농담과 진담이 아주 적절히도 섞여 있었다.
태섭은 늘 그래왔듯,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다.
아홉수? 대한민국 미신 중의 하나라 여겼으며, 서른을 앞둔 건방진 애송이들에게 몸과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이겠거니 했다.
...... 그래서는 안 됐던 건데.
실은 1월 1일 신정부터 좋은 시작이 아님은 분명했다. 12월 31일까지는 멀쩡했는데, 그날부터 으슬으슬 추워지더니 오한을 넘어 고열까지. 열감기에 이 정도로 앓아누운 적 없던 몸이 놀랐는지 일주일 내내 고생했다.
2월에는 출퇴근하며 잘만 걸어 다니던 도보에서 발을 접질러 깁스를 했고, 오른발에 깁스를 한 태섭이 만만해 보였는지 성수에서 소매치기 당했다. 가방 안에 든 지갑(체크카드 한 장, 신분증, 3만 7천 원이 있었다), 이어폰, 선글라스, 새로 산 피어싱이 한 번에 다 증발해버렸다.
3월에는 태섭이 수상 스키 아카데미 강사로 일하고 있는 여의도 인근 마리나1에서 일이 터졌다. 포근하니 기분 좋아지는 초봄 날씨였는데, 작년부터 관리하던 제트 스키를 시범 운행하다 한강 한가운데서 모터가 멈추는 바람에 오리알 신세로 둥둥 떠 있었다. 폰은 안 터지고 하필 또 비수기에 일찍 출근한 직원은 태섭 말고는 없었기에 억까 중의 억까였다. 벚꽃도 피지 않은 이른 봄날의 한강은 땅 위와는 다르게 상당히 추웠으므로, 태섭은 또 한참을 앓아누웠다.
4월. 보다 못한 송아라가 태섭의 등을 떠밀었다. 이러다 우리 둘째 오빠야,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보고 첫째 오빠 따라 멀리 가버리는 게 아니냐며. 운전대마저 여동생에게 빼앗겨 옆좌석에 수납당해 끌려가듯 도착한 곳은 용산 전자상가였다. 철거를 앞둬 매장 대부분이 빠져나가 폐건물이나 다름없는 나진상가 14동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도 없이 높이가 들쭉날쭉한 계단을 한참을 올랐다.
사주 명리학, 궁합, 작명, 관상, 손금 전부 다 한다는 아주 유명하고 용한 철학관이라고. 여동생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태섭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라의 절친한 대학 동기가 작년에 여기서 점인지 사주인지를 보고서는, 돈 많고 잘생겼는데 다정하기까지 한 남자친구를 만나 다음 달에 결혼을 한댔나.
사기꾼 만난 거 아냐?
그리고 그게 아홉수랑 무슨 상관인 건데?
그렇다고 오빠가 되어서 세 살 어린 여동생의 진심 어린 걱정을 모른 척하고 돌아갈 수도 없으니,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철학관이라 쓰인 철문을 두드렸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제일 먼저 띈 건, 손을 앞뒤로 흔드는 작은 마네키네코였다. 발 아래 붙은 코딱지만 한 솔라패널이, 누렇게 변색된 창문 필름지 사이로 비쳐오는 햇빛을 애써 붙잡고 있었다. 창문 맞은편 벽은 도대체 언제 출판된 건지 알 수도 없는 오랜 책이 빼곡히 꽂힌 나무 책장이 줄지어 있었고 거대한 몬스테라 화분이 중앙에 떡하니 있었다.
한마디로 철학관이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이었는데, 제일 잘 안 어울리는 건 역시 게이밍 피씨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가 32인치 모니터 앞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유명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입구 앞에 선 아라가 "저기요!" 불러도 한참 답이 없자, 태섭이 먼저 다가가 남자 등 뒤에 섰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건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선생이라는 작자는 '금이'라는 이명을 쓰고 있었는데, 태섭의 못마땅한 얼굴을 느리게 한 번 훑어보더니 아라를 바라보며 "니가 있어서, 니 오라비가 그나마 살아있구나." 했다. 그 말에 태섭의 눈은 절반으로 좁아들었다. 눈썹 하나가 삐죽 올라가 매섭게 날을 세우는데도 선생은 흥, 하고 콧방귀만 뀌었다.
이상한 이름의 선생이 거대한 토분에 수돗물 한 잔을 쏟아부었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몇 장 뒤적이고서, 온 세상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아홉수.”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아홉수야. 임수壬水2구만. 정축년丁丑年3 7월 말일, 축미충丑未沖4. 한여름 뙤악볕 미월5에 태어났는데도 이렇게 물이 많아 서늘해서야. 속내는 또 왜 그렇게 꽁꽁 숨겨 남들한테 한 자락도 안 보여주나? 독하고 외롭고 고집도 있고. 차갑디 찬 진흙 바닥 위에 촛불 하나 애지중지 켜뒀으니…… 쯧쯧, 안 꺼뜨리려고 악착같이도 살아왔겠어. 자네의 병오년丙午年6은 평범하지 않다네, 한마디로 수다토류水多土流7. 특히 몸 안 다치게 조심해야 하는 해이기도 하네. 아무리 단단한 바위여도 계속 깎여나가면 큰일이 나는 법. 여러모로 사리지 않으면 큰돈이 한 번에 나갈 수도 있어.
뭐, 그래도 재밌는 건 말이지……, 이런 개그지 같은 운명이어도 볕들 날 있다고, 올해 천을귀인天乙貴人8이 있구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줄줄 늘어놓는 바람에 태섭은 남자의 말을 절반만 듣고 절반은 흘렸다. 개땅그지라는 말은 아주 귓속에 푹 박혔지만.
어쨌든, 핵심은 2026년이 몸이 사서 고생하는 해라는 것. 그리고 봄이 지나갈 즈음에는 태섭을 도와줄 귀인이 나타나 하반기부터는 해결해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병 주고 약 주고인지. 철학관이면서 점집처럼 지갑에 넣어 다니라며 부적도 해줬다. 지갑 소매치기 당했는데요. 톡 쏘아 말하니, 그럼 뭐 팬티에 꼬매 다니던가. 선생이 대꾸했다.
……그때 아라가 복비로 얼마 냈더라……
어차피, 물 기운이 세서 6월이 되기도 전에 부적 효력이 엥꼬 날 거라 했는데…… 그래서 내 몸이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지게 된 걸까.
사이렌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아라랑 엄마의 목소리도.
정신을 잃었을 때와는 다르게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수면내시경을 하고 일어난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천장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눈 한쪽은 거즈가 덮여 보이지도 않았지만 처음 보는 천장이란 건 알아차렸다. 여기가 어디지. 차근히 생각이란 걸 하려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에도 보호대를 두르고 있어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려워, 끙, 소리 냈다.
"정신이 좀 들어?"
공간만큼 낯선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어머님이랑 여동생은 갔어."
남자의 과일 깎아내는 솜씨가 영 서툴러서 껍질과 사과 과육이 뭉텅뭉텅 함께 도려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 한눈으로만 봐도 비싸 보이는 과일 바구니에서 새 사과를 꺼내 든 남자가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가족들을 이렇게 일찍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니가 몰던 가와사키는 급발진 트럭에 개박살이 났고."
"……."
"다행히 넌 타박상 정도가 끝이야, 오히려 트럭 쪽에 타고 있던 사람이 더 크게 다쳤어."
"아……."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식으로 계약을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사귄지' 한 달도 안 돼서 이러면 곤란한데.
남자가 울퉁불퉁한 사과 조각을 하나 집어 와삭, 깨물어 먹는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과일 접시를 들어 태섭의 머리 맡 협탁에 내려두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계약? 남자가 한 말을 곱씹으며 태섭이 그 얼굴을 올려다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왼 턱에 아물고 있는 긴 상처다. 잘 다듬어진 머리에 오똑한 코.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진녹의 눈동자.
"병원에 입원한 건 내가 마리나에 말해 둘 테니까. 일단 더 자."
정신 들면 전화하고.
연락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태섭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병실을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고 적막이 찾아오자 태섭은 알아차렸다. 지금 누워 있는 이 공간에 대해서. 아주 좋은 침대에 손님을 위한 소파도 있고 천장 조명도 눈부시지 않은 게 마치 호텔 방 같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은 태섭이었지만, 그렇다고 일생이 유별났던 건 아니다. 소득수준은 딱 평범한 일반인의 범주였다. 엄마도 송아라도 로또나 연금복권에 당첨된 적은 없으니 이런 호화스러운 VIP 개인 병실? 절대 생각지 못했을 거다. 태섭이 끙, 하고 상체를 느리게 일으켰다. 손끝과 발끝의 감각을 조금씩 일깨우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차근히 정리하기 시작하자, 남자의 정체도 저절로 떠올랐다.
침이 꼴깍 절로 삼켜진다. 환자복 아래 등이 시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불을 도로 뒤집어쓰고 발길질하고 싶었으나, 종아리와 허벅지를 지나 엉덩이까지 타고 오르는 고통에 으악, 짧게 비명을 내지르고 그만뒀다.
남자는 재수 밥 말아먹은 웬수였다.
웬수? 원수나 다름없지. 태섭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으니. 이딴 지랄맞은 악연이 인생에 또 있을까. 태섭은 누운 채 바들바들 떨었다.
"정대만……!"
정대만.
그래, 남자의 이름은 정대만이었다. 계약서에 선명히도 박혀있던 세 글자를 어찌 잊을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5월 22일의 그 밤을 회상했다.
마리나에서 일한지 일년이 조금 안된 태섭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매년 챙기는 무슨 기념일 이라면서 마리나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파티를 해줬다. VIP 고객들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늦은 저녁 시간까지는 마리나 운영을 하지 않는데, 그 날은 본 건물 말고도 계류장9에도 환하게 불을 켜 마치 축제 분위기였다.
마리나가 소유하고 있는 요트란 요트는 죄다 갑판 등을 밝혀 유별나기도 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저마다 노랗고 붉은 불빛을 매달고 물 위에 둥둥 떠있으니, 마리나 인근 한강이 꼭 야시장이라도 연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수면은 잘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배에서 떨어진 불빛도 강물 위에서 같이 일렁였다.
거기서 끝이 아녔다. 관리하는 배 중에서 가장 큰 배를 한강에 띄워 팀끼리 밤새 놀 수 있도록해줬다. 노량진에서 주문한 회랑, 처갓집 슈프림 양념치킨, 잭슨 피자, 맥주, 소주, 일본주까지 . 주종을 가리지 않고 아낌 없이 차려진 테이블에 레저 아카데미 팀도 아주 오늘만 살 것처럼 마셨다.
갑판 위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던 태섭이 팀 내 강사들이 말하는 걸 옆에서 얼핏 들었다. 5월 22일이 마리나 요트 클럽의 설립일이자 운영사 대표님 생일이기도 하다고. 숭어회를 한 번에 세 점씩 집어 쌈싸먹던 태섭이, "인심 짱 좋다." 감탄하듯 중얼거리자 야마자키 12년산 병을 들고 선미로 걸어오던 고인물 강사 형이 말했다.
"근데 근 몇년간 대표를 본 사람이 없어."
"본 사람이 없다고요?"
"어엉, 소문은 무성한데~"
"소문?"
"아 태섭이는 모르려나. 이 마리나가 한일 합작 어쩌구 같은 거거든"
"몰랐어요."
태섭이 젓가락 한짝을 입에 물고 고개를 좌우로 젓자, 이번에는 다른 강사 누나가 이어서 말했다.
"한국에서는 삼정 그룹, 일본에서는 미츠이 해운이었던가 그랬어. 그래서 대표님이 양측 회사랑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무성해."
아하, 글쿤.
정도의 반응으로 넘겼다. 여기 근무하면서 대표라는 사람이랑 대면할 일이 생기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에서 삼정을 모르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엄청난 규모의 대기업인데. 일본의 미츠이 쪽도 두 말하면 입 아프고. 그런 어마어마한 회사들이랑 관계있는 사람이라면, 나이도 지긋하겠지. 그런 사람이랑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다해도 아이고 대표님, 아이고 직원님, 하면서 아는 척할 리 없잖아. 나이가 6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어색하게 인사하는 상상을 하며, 이번에는 태섭의 젓가락이 참돔을 향했다.
한참을 마시고 먹다가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싶어진 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판이 물살에 맞춰 살짝 출렁이는 탓에 첫 걸음부터 휘청였다. 옆에 있던 누군가 팔을 붙잡아준 덕에 겨우 균형을 잡고 선착장으로 이어진 발판을 밟아 내려갔다. 나무판이 삐걱대는 소리와 찰박이는 강물소리가 뒤섞였다.
달도 없이 새카만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 한강 위로 반짝이는게 별 빛인지 요트 위의 등불 빛인지 알 수 없지만 세어가며 흐느적 흐느적 땅을 다시 걸었다. 막차도 끊긴 채 귀가하는 건 대학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지 않나? 요트와 보트들이 줄지어 정박한 수상 계류장을 빠져나온 태섭은 마리나와 한강 공원을 잇는 산책로 벤치에 앉아 술기운이 조금 가시기를 기다렸다.
바스락.
바스락.
눈을 감고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는데, 근처에서 계속 풀숲 밟는 소리가 들렸다. 종종 밥 챙겨주던 고양이가 왔겠거니, 눈을 슬그머니 뜨니. 왠 낯선 남자가 마리나 입구 잔디밭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상의, 하의, 신발 할 것도 없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부 다 올 블랙. 게다가 깊게 눌러 쓴 캡모자까지. 모자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키는 확실히 180을 넘는다. 수상 스키 강사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남자의 수상함의 정도가 지나쳐, 태섭은 고양이처럼 눈을 뜨고 벤치에 똑바로 앉아 남자를 관찰했다.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은 마리나 본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이 꺼져있다보니, 근처에 태섭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계류장으로 이어진 길 쪽을 계속 바라보던 남자는 수리를 위해 육상으로 옮겨온 중형 요트 옆으로 걸어나와 전화를 걸었다.
"약속한 물건은 준비했고?"
약속한 물건?
"지금 여기가… 솔직히,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 아마 계류장으로 근처 같은데. 다들 파티 때문에 정신 없을테니 빠르게 움직여."
빠르게 움직여?
태섭이 몸을 더 낮게 숙였다. 남자는 중간 중간 일본어를 섞어 말했다. 누가 보고 들었어도 딱 범죄 현장이라 확신했을 거다. 마약범인가, 아니면 뭐라도 훔치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최근 잠원 쪽 마리나에서 호화 요트 세 척의 부품만 골라 털린 사건이 있었다. 엔진이랑 리튬 배터리가 싹 다 뜯겨 나갔다던데. 그렇게 분해한 부품들은 중국이나 동남아 쪽 암시장에 넘어간다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술기운이 아주 달아났다.
분명 그 일당 중 하나일 거라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마리나에 정박된 요트 대부분이 재력가들의 자산이다. 최소 몇 억부터 몇십 억까지 하는 배를 비싼 돈 주고 마리나에 관리 위탁하는 거다. 요트는 자동차처럼 보험이 다양하지도 않아서, 관리 미흡으로 벌어진 사고는 전부 마리나 책임이나 다름없다. 수상 레저 산업이 더딘 한국이라면 더더욱.
태섭이 일하는 마리나 요트 클럽은 한강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운영도 관리도 늘 최대 인원으로 돌아가지만, 겨우내 증축한 계류장은 이전보다 두 배 넘게 커진 탓에 되레 보안이 허술해진 구석도 있다. 저 도둑놈이 말한 것처럼, 다들 파티에 취해 정신 팔린 오늘이 적기일 수도 있다.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덩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고딩 때부터 주먹 하나는 자신있던 태섭이다. 저 도둑놈이 무슨 짓을 하는 것 같아 보이면 몸을 날려서라도 막자. 누가 올 때까지 못 도망가게 붙잡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숨을 죽이고 벤치 옆으로 수리장 쪽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니 남자가 한강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태섭이 잽싸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매달린 후 체중을 실어 남자를 바닥에 넘어뜨리자 모자가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났다.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에 태섭이 살짝 놀랐지만, 것보다 더 놀란 남자가 태섭의 몸을 밀쳐내고 일어나려했다. 물러서지도 않고 다시 커다란 몸 위로 올라타 힘을 준 태섭이 사방팔방에 소리를 꽥 꽥 질렀다.
"도둑이야!!!!! 도와주세요!!!!!"
남자의 커다란 손이 태섭의 얼굴 하관을 통째로 덮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조용히 안 해?" 속삭이자 태섭이 읍읍거리며 반항한다. 도둑놈이 뭐래? 너 같으면 조용히 있겠냐. 온몸을 비틀며 버둥거리던 태섭을 눕히고 남자가 위에 올라탄 형세가 되자 압박이 더 심해졌다. 입과 코가 동시에 막혀 숨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태섭은 눈을 질끈 감고, 결국 먼저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남자의 얼굴에 정타로 꽂혔다.
컥, 소리와 함께 남자가 물러섰다. 휘청거리며 일어나 도망치려는 걸 태섭이 다시 다리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그때 남자의 턱이 수리장 바닥 돌부리에 길게 찢기며 피가 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피를 훔쳐 내려다본 남자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악착같이 붙어오는 태섭을 힘껏 걷어차 올라타서는 주먹질했고, 태섭도 지지 않으려 주먹이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한마디로 개싸움 난장판이었다. 남자가 흘린 피 때문에 태섭의 스투시 티셔츠엔 붉은 자국이 남았고, 남자 역시 태섭의 코피에 손등이 붉게 물들었다. 허억, 허억, 피비린내 나는 숨을 몰아쉬던 사이에 누군가 건물에서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태섭이 반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도둑 잡았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순간, 그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미츠이 상! 아니, 정 대표님! 도대체 이, 이게 무슨……!"
Footnotes
-
요트나 보트 같은 레저용 선박을 정박하고 보관하는 시설과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항만 ↩
-
십간(十干) 중 하나로, 큰 강이나 바다처럼 넓고 깊은 물의 기운을 뜻함 ↩
-
육십갑자 중 하나로, 1997년을 가리키는 간지(干支). 본 글의 송태섭의 생년월일: 1997년 7월 31일 ↩
-
사주에서 축(丑)과 미(未)가 서로 부딪혀 충돌을 일으키는 살(煞), 급격한 변화나 사건·사고를 암시함 ↩
-
7월 ↩
-
육십갑자 중 하나로, 2026년을 가리키는 간지. 병(丙)과 오(午) 모두 불의 기운이 강함 ↩
-
물(水)이 지나치게 많아 흙(土)이 휩쓸려 무너지는 형상을 이르는 말 ↩
-
사주명리학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귀인을 상징하는 길신(吉神) ↩
-
배를 정박해두는 곳(선착장과 비슷한 개념) ↩
이전화
-
다음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