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 구름이 높이 뜬 맑은 하늘.
눈부신 햇빛 사이로 비가 내리는 이상한 날이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하나가 빛을 반사한다. 온 길거리에 눈부신 보석을 길게 걸어 놓은 듯한 착각이 든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멈춰서 새파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체육관 바닥 보수 공사로 농구부 활동이 일주일간 없어져, 평소보다 일찍 하교 중이었던 미츠이 히사시도 떨어지는 물방울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우산 없는데.'
이렇게 날이 맑은데 작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비가 내리다니, 신기한 것보다도 귀찮게 됐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갑작스런 비에 미츠이의 옆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말했다.
"여우비인가 봐."
여우비? 이런 걸 여우비라 하는구나.
처음 듣는 단어였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이상 기상현상에 미츠이는 손을 들어 젖어드는 머리칼을 털어낸다. 맑은 하늘과 비.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날씨가 공존할 수 있다니, 말 그대로 여우에게 홀린 듯한 날씨다. 제법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거나 카페 차양 아래로 사람들이 분주히 걸음을 옮긴다.
비를 피하는 인파 사이로 쪼르르 달려가는 작은 키의 갈색 곱슬머리가 미츠이의 눈에 들어왔다. 한쪽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건너편 골목으로 잽싸게 사라진 저 녀석은, 틀림없이 얼마 전 바닷가 근처 야외 코트에서 만났던 드리블 잘하는 녀석!
보기로 했던 친구놈들이 약속 시간에 전부 다 늦는다니. 딱히 혼자서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만 잠깐 머무를 생각으로 들렸던 그 야외 코트.
갈색 머리의 그 녀석은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지칠만도 한데 홀로 공을 튀기고 있었다. 혼자하는 농구라? 얼핏 봐도 농구를 꽤 한 티가 나는 자세였다. 맞은편 골대 쪽에는 5명이 주르륵 앉아 녀석을 힐긋거리며 수근거리거나 구경이나 하고.
그러니까 미츠이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혼자서는 잘하기 힘든데, 왜 궁상맞게 하고 있지? 저놈들이 같이 안 해주고 따돌린거 아냐? 아니면 설마의 설마로, 혼자하기를 고집하나?
철장 너머로 멀뚱히 감상하던 미츠이는 제 호기심을 참지 않기로 한다. 홀로 얼마나 집중하고 있던지, 녀석은 안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미츠이는 저 작은 손에서 농구공이 떠나가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빠르다.
그리고 여기서는 보기 힘든 스타일. 미츠이의 관심이 작은 몸짓에 쏟아진다. 그래도 말이지. 아무리 잘해도 혼자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지?
— 아.
턴을 하며 일순간 무너진 자세에 엇나간 공이 텅, 텅, 텅 튀어 미츠이의 발 앞까지 굴러온다. 공이 더 낮게 구르기 전에 텐션을 더해 공을 띄워 잡았다. 모르는 사람의 등장에 당황한 듯한 표정, 미츠이가 먼저 부드럽게 웃어보인다.
지금부터는 내가 네 농구에 어울려 줄테니까.
철썩, 미츠이가 깔끔하게 쏘아올린 3점이다.
그 나이대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그런 완벽에 호를 그리며, 쭉 뻗은 팔과 손 끝을 떠난 공은 매끄럽게 림을 지나 그물 안으로 들어간다. 오— 맞은 편의 다섯이 먼저 미츠이를 보며 감탄했지만, 미츠이는 그쪽에는 전혀 관심 없다. 당연하지. 난 지금 오직 널 위해서 넣은거라고. 그저 입을 작게 열고 저를 바라만보는 소년을 향해 공을 패스하며 앞으로 걸어가 자세를 낮춘다. 키도 한참 작아서는, 발도 손도 거의 제 절반만 한 게 미츠이는 일절 의심조차 못했다.
— 초등학생?
정말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마치 동화 속 앨리스가 흰 토끼의 엉덩이를 보고 쫓아가듯. 오색으로 빛나는 비를 맞으며 녀석을 쫓아갔다. 멈춰선 곳은 공사 패널이 들쭉날쭉하게 늘어선 골목이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나쁜 짓이라도 하고 다니는건가? 아니면 질 나쁜 놈들한테 심부름이라도 당했나? 오늘 미츠이의 호기심은 역시나 한 사람만을 향했다.
꽤 긴장한 미츠이가 전봇대 뒤에 숨어 지켜본다. 녀석은 두리번 거리면서 주변을 몇 번이나 살핀다. 제 키보다도 훨씬 길쭉한 패널 하나를 들어 옆으로 살짝 옮기더니 그 안으로 쏙 사라졌다. 안으로 사라진지 몇 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미츠이도 그 패널 앞에 섰다.
그녀석이 했던 것처럼 패널을 들어 옆으로 옮겨보니 어린 아이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틈이 나타난다. 장난해? 이렇게 좁은데를 어떻게 들어간거냐고! 토끼굴도 이정도는 아니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다. 미츠이는 기다란 몸을 구겨 겨우 들어가 뒤를 쫓았다.
공사 중일 거로 생각한 안쪽은 그저 버려진 공터였다. 빽빽한 건물들 사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뻥 뚫린 공간. 완전한 공터라 하기에는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꽤 있었다. 목조 건물의 잔해 같아보이는 두터운 기둥이라던가 판자 더미, 크고 넓적한 돌… 오랜 시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잡초는 미츠이의 어깨높이까지 길게 자라있었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만 좁게 길이 난 것처럼 풀이 짓눌려있다. 작은 야생 동물이 만들어낸 것 같은 길을 따라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얕은 잔디밭과 이끼낀 자갈이 가득 깔린 작은 연못(이라해도 빗물이 고인거겠지)이 있다. 새파란 하늘이 반사된 물의 경계가 여우비에 출렁인다.
햇빛이 풀잎 사이로 드러났다가 사라지면, 긴 빛줄기가 연록과 밝은 금색 잔상을 눈에 남겼다. 보라색과 하얀색의 이름 모를 작은 꽃의 군락지가 곳곳에 있다. 배추흰나비들이 아슬아슬 빗방울을 피하며 꽃잎 위를 팔랑거리고. 분명 여름이 한창임에도 이곳의 광경은 마치 봄에 멈춘 것 같아 미츠이는 짧게 감탄한다.
"먁."
어디서 나타난건지 하양, 노랑, 검정으로 삼색의 털을 가진 아기 고양이가 제 신발 위로 올라오는 걸 보며 정신을 차린다. 조그마한 발톱을 세워 미츠이의 교복 바지를 익숙하게 기어올랐다. 윽. 작아도 발톱은 발톱이라고, 미츠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넌 뭐야?"
몸을 숙여 고양이를 두 손으로 잡아들어올렸다. 고양이는 세모난 귀를 좌우로 퍼덕이며 미츠이의 녹색 눈을 빤히 쳐다본다. 노란색 눈이 대답이라도 하듯이 꿈뻑인다. 사람 손길이 익숙한지 제 몸을 들어올린 낯선이의 손을 까슬한 혀로 몇 번 핥다가 먉, 웨옹 짧고 길게 울어댄다.
그러다 작은 머리통을 옆으로 갸웃, 미츠이가 자신에게 줄 것이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버둥거리며 잽싸게 품에서 뛰어내려 풀숲으로 폴짝폴짝 사라진다.
"잠깐!"
미츠이가 흔들리는 고양이 꼬리를 따라 더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공터의 제일 안쪽. 다른 건물과 맞닿아 있어 마저 허물지 못한 작은 목조 창고 앞에 그녀석이 앉아 있었다.
아기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미츠이의 바지를 타고 오르던 삼색 고양이 말고도 검은 고양이와 금빛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들은 녀석의 품에 안겨 그릉, 그르릉 거리다 검은 비닐에서 꺼내주는 멸치를 덥썩 물고 텁텁 먹기 바쁘다. 한 마리, 한 마리 차례대로 나눠 주는데도 먼저 먹겠다며 녀석의 가슴과 팔에 달려들어 오르고 있었다.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 야외 코트에서 농구공을 열심히 튀기던 작은 손이 보송보송한 털을 여러번 쓰다듬는다. 그친 줄 알았는데, 다시 또 비가 투두둑 햇빛과 함께 쏟아진다. 그 광경을 넋놓고 엿보던 미츠이가 정수리 위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 으악! 소리 질렀다. 제일 먼저 경계가 심한 동물들이 그 소리에 놀라 일제히 창고 안으로 먼저 숨어들었고, 고양이 만큼이나 놀란 그녀석도 눈이 동그래져서는.
결국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치도 못한 인물이었는지 갈색의 두 눈이 처음 만났던 날보다도 커졌다. 햇빛이 건물과 빗방울 사이를 길게 가로질러 그 눈을 호박색으로 반짝이게 한다. 곱슬 머리는 젖어들면서 더 구불거리고, 체구보다 조금 품이 큰 교복 셔츠 사이 — 빗줄기가 목선을 타고 흐르는게 보인다.
뭐지.
이 녀석 원래 저렇게 눈이 컸나?
볼이 말랑해보였나?
입술이….
"그… 아니. 너, 너… 여자였냐?"
"남자거든?"
"엑."
거짓말이지.
분위기가 순시간에 어색해진다. 아니, 애초에 그정도로 귀여운 느낌인 네 잘못인거 아냐? 미츠이가 머리를 긁적이다 녀석이 앉아있는 계단 옆으로 다가가 나무 벽에 기대섰다. 여자로 착각한 것에 화가 난건지, 입술을 내밀고 볼을 부풀린게 더 귀엽게 보일 뿐인데. 그러고보니 목소리도 처음 듣네.
"여기는 뭐야?"
"…."
"어른들한테 말 안할게."
"…."
"정말로 말 안한다니까."
"…… 일주일 전에 우연히 아기 고양이를 봐서."
미츠이가 끈질겨 못이기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하, 챙겨주고 있던건가. 고개를 돌려 고양이 세마리가 숨어 들어간 곳을 기웃거려본다. 창고 문짝이 아다리가 맞지 않아 안이 훤히 보였다.
작은 플라스틱 테이블과 어디서 줏어온 것 같은 낡은 접이식 의자, 건전지로 동작하는 램프, 고양이들이 숨어든 과자 상자. 그리고 낡은 농구공이 있었다. 고양이들이 상자 위쪽으로 눈까지만 내놓고 문 밖의 미츠이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마치 비밀 기지 같네."
"아."
"난 미츠이 히사시. 넌?"
"나?"
"계속 '너' 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 녀석, 저 녀석이라고 할 수도 없고. 미츠이를 한참을 올려다보고 조금 망설이듯 교복 자락을 쥐었다 폈다가 하더니, 도톰한 입술이 열린다.
"미야기… 료타."
"미야기."
옹알이같이 작게 말했어도 분명히 들었다. 미야기 료타. 역시 카나가와에서 농구하며 들어본 적 없는 이름. 어느새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먼저 다가오나 싶더니 미츠이를 향해 하아악 거리고서 옆을 호다닥 피해 미야기의 다리에 찹딱 붙었다. 머리를 부비적 거리는 고양이를 미야기가 들어올려 무릎 위에 올린다. 다른 두 마리도 좁은 창고 안에서 연달아 나와 미야기의 옷에 매달려 다시 먁먁 울어댄다.
이 녀석들 나를 완전 악당 취급하잖아.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그, 그건 저 녀석을 쫓아왔어."
미야기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미츠이는 급하게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차마, 널 보자마자 시내에서부터 여기까지 무작정 뒤따라 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고, 맨 처음 마주쳤던 삼색 고양이를 가리켰다.
"밋쨩은 호기심이 많아."
"어, 나?"
"아니. 이 녀석 이름. 노랑이 히쨩, 검정이 훗쨩, 삼색이 밋쨩 *ひ히(하나)、ふ후(둘)、み미(셋)."
뭐야, 그거.
귀여우니까 얼굴 붉히면서 소개하지말라고. 미츠이의 얼굴도 미야기를 따라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훗쨩 말고는 히쨩, 밋쨩 둘 다 나에게는 익숙한 호칭이라고.
"그나저나 원래 이시간이면 농구부에 있을 시간 아냐?"
"… 농구부 아닌데."
"뭐라고!"
"왜, 왜?"
"농구부도 아닌데 그렇게 잘한다고?"
나랑 같은 학교였으면 더 재밌었을텐데 아쉽다. 처음 본 날에는 초등학생이라서 같이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미야기가 입은 교복을 보니 학교가 다를 뿐, 중학생이었어. 기특해하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자 미야기의 얼굴이 토마토만큼 붉어지더니 미츠이의 손을 탁 쳐냈다.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꼬맹이 주제에 손이 맵잖아, 너."
"꼬맹이 아니야."
"헤에, 초등학생만 아니지 다 작잖아."
"… 그래도 아냐!"
미야기는 밥도 많이 먹고 우유도 많이 마셔야겠는데. 농구하려면 적어도 나만큼 키가 커야할 것 아냐? 미야기가 눈썹 하나를 달리 뜨더니 고개를 홱 돌린다.
"미야기, 농구는 계속할 거지? 고등학교에서는 나랑 만날 수도 있잖아."
"…미츠이?… 는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어?"
"우리는 오늘로 우연히 두 번 봤을 뿐이잖아."
그러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그야, 농구 잘하는 녀석이랑 같은 팀에서 뛰고 싶으니까? 근데 그것만으로 시내에서 미야기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게 말이 되나?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곳까지 쫓아온 것까지 포함해서? 미츠이가 팔짱을 끼고 마땅한 까닭을 찾아 고민하더니, 제대로된 이유는 찾지 못하고 변명같은 말을 한다.
"미야기가 …그… 음, 동생?… 같아서?"
"동생?"
"혹시 나랑 같이 있는게 싫어?"
"……."
지난번에도 원온원하면서 말 한마디 안 했잖아. 미야기가 미츠이의 말을 듣더니, 좁은 무릎 위에 가득찬 털복숭이들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중얼 거렸다.
"…싫진 않아."
대답을 듣자마자 옆에 서 있던 미츠이가 미야기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럼 된 거 아니겠어. 료타."
갑자기 이름으로 불린 것에 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귀엽다.
"너도 밋쨩이라고 불러도 돼."
밋쨩이라 하자마자 고양이 밋쨩이 귀를 쫑긋하며 미츠이의 다리에 앞발을 뻗어 팍, 쳐낸다. 미츠이도 손을 뻗어 삼색 고양이의 털을 마구 쓰다듬는다.
"너 말고."
"풉."
아, 웃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료타.
미츠이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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