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그리고 잠 안 와.
한국에 돌아온지 오늘로 4일… 아니지 이제 5일차, 시차 적응을 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피곤한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 속 시간을 확인한 태섭의 입에서 한숨부터 터져나왔다. 유독 이번 비행에는 잠에 들 수 없었다. 아득바득 보냈던 미국 생활을 드디어 마무리한다는 생각에 긴장이라도 한 탓인지…….
자그마치 7년. 그 동안 변하지 않은 걸 찾아내는게 더 어려울 한국이다. 내 나라에 대한 제대로된 기억은 10대 때가 마지막이니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릴 것이 한 둘이 아녔다. 근심 걱정 없이 가볍게 돌아왔다면 거짓말이지. 당장 살아갈 집을 구하는 것부터 허둥댔으니까. 한국에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집에는 침대랑 작은 태이블만 겨우 구해 넣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달 정도 호텔에서 지내면서 찾아볼걸.
눈꺼풀이 감겼어도 또렷하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몸을 돌려가며 뒤척이던 태섭은 이불을 걷어차더니 눈 비비고 일어났다. 눈도 머릿속도 퀭했지만 이럴 땐 몸을 고생시키는게 좋다.
어차피 집 주변도 살펴봐야 했으니까 산책겸 돌아보려했는데 본격적인 야간 러닝이 되어버렸다. 헉, 하아. 동네를 크게 한바퀴 뛰돌아 온몸이 땀에 젖어갈 때 쯤 지도 앱이 알려준 편의점에 들렸다. [Home]이라 저장해둔 집 모양 아이콘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었다. 문 앞에 어색하게 서있던 태섭이 안쪽을 살피며 발을 들이자 이내 몸을 감싸는 시원한 공기에 기분이 전환됐다.
맥주나 한 캔 할까.
목적은 포카리스웨트였는데, 갑자기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차피 오늘도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잠들겠지. 잠들 때까지 밀린 넷플릭스 시리즈나 볼테고. 7년 만의 포카칩을 안주로 가볍게 마시고 싶다.
규모가 꽤 큰 편의점을 천천히 둘러봤다. 늦은 밤이라 그런가 동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다. 미국에서는 본 적 없는 낯선 음료 코너를 지나 맥주캔이 가득찬 냉장고 앞에 섰을 때 누군가 태섭의 옆으로 다가왔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커다란 인기척에 태섭은 그러려니 했다. 미국에서는 어딜가도 저보다 큰 사람들 뿐이었으니까. 이따금씩 시선이 길게 느껴져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키가 170은 넘길까 말까 하는 동양인 농구 선수란 그들 눈에도 유별나 보일 수 밖에 없잖아.
'수입 맥주, 4캔 12,000원?'
20여 종은 넘어보이는 맥주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교차 가능? 할인 품목? 신상품? 음, 미국에서도 맥주 가격이 이랬나? 늘 번들로 사서 더 저렴했던 것도 있겠지만.… 커다란 문짝에 붙은 행사 문구를 노려보다 갸웃거리던 태섭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지나간다. 그제야 눈동자가 돌아갔다.
길고 곧게 뻗은 손.
손톱 끝이 뭉툭하게 잘 다듬어져있는 손이다.
앞에 태섭이 있어도 상관 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테라 맥주캔을 꺼낸 커다란 손은 냉장고 문이 닫히지 않게 계속 잡아 둔다. 남자의 손을 멍하게 바라만 보던 태섭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아. 바보같은 소리를 내며 다급히 맨 윗줄에 있는 하이네켄과 빅웨이브을 꺼내 쥐어들자, 머리 위로 훗, 하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왜 웃지? 눈썹 하나를 매섭게 들어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니 남자가 말했다.
"키가 너무 작은 거 아닌가?"
그놈의 키 작다는 소리. 정수리에 따라붙던 시선 만큼 많이 들어서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어렸을 땐 아쉬웠을 지 몰라도 진지하게 농구를 업으로 삼고 나서는 적당히 흘려 넘겼다. 오히려 태섭의 작은 키와 빠른 스피드가 정체성이자 생존수단이 되어준 것도 있다. 그만한 키에 잘 붙지도 않는 근육을 고통스럽게 늘려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좋든 싫든 바꿀 수 없다면 빠르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있는 거다. 어쨌든 지금의 태섭에게 키 작다는 말로 시비 털려면 '그 남자' 정도는 되어야 할거다.
정대만….
그래, 정대만.
응? 태섭의 눈이 커졌다. 설마. 힐긋 보려 반쯤 떴던 눈이 활짝 열려 왼 입꼬리를 올려 웃는 남자에게 고정된다. 흰 티셔츠에 멜란지 그레이 반바지를 입은 남자에게.
왜? 어째서? 한국에 오자마자 구한 오피스텔에서 제일 가까운 GS25에 정대만이 있는거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대만은 태섭이 고른 맥주까지 전부 샀다. 태섭이 괜찮다고 도로 뺏으려 했지만 대만의 갤럭시가 카드 리더기에 닿는 속도가 더 빨랐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친 편의점 알바의 경쾌한 목소리에 태섭도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맥주를 빼앗겨 도망치지도 못하고 대만의 뒤를 따랐다.
편의점 야외 테라스에 놓인 간이 테이블과 의자는 여전히 열기를 품어 뜨끈했다. 울퉁불퉁한 데크 바닥에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동그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대만의 맞은편에 앉은 태섭이 먼저 맥주캔을 따 한모금 들이켰다. 술기운 없이는 이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만은 그런 기색도 없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태섭을 보며 웃기나 하고. 후배가 거리낌 없이 술 마시는걸 본 대만도 이내 맥주캔을 땄다.
"…어째 넌 그대로네."
"뭐요?"
그럴리가. 태섭이 반사적으로 툭 대답한다. 옆에서 보면 가슴팍이 다 보일 정도로 헐렁한 나시에 적당히 무릎 아래까지 오는 버뮤다 팬츠, 그리고 짙은 보라색 헤어밴드. 대한민국 고딩 신분으로는 시도도 못할 스타일이다. 미국 서부의 햇빛에 타들어간 까무잡잡한 살갗과 단단해진 근육의 무게감도 그 시절의 송태섭과는 한참 다른데. 맥주캔 끝을 앞니로 쿡 찝은 태섭의 오른 눈썹이 또 올라섰다. 그걸 보더니 정대만은 또 웃을 뿐이고. 불쑥 뻗어온 손이 헤어밴드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준다.
"역시 그대로 잖아."
어쩐지 아까보다 더 더워진 것 같은데.
7년을 무색하게 하는 이 거리감은 뭐지.
…대로변 줄지어 가로등 빛 사이 높게 뜬 달. 이따금씩 여름 바람이 스치는 플라타너스 나뭇잎. 지칠 줄 모르는 매미의 짝 찾는 아우성. 손바닥에 스며드는 알루미늄 표면의 물기. 이제야 한국에 왔음이 실감난다. 태섭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대만의 앞에 와서야.
머리 위 대만의 손을 잡아 테이블 위로 내렸다.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내려 놓으면서 살짝 맞닿은 중지와 검지는 떼어내지 않았다. 손가락과 손가락 끝이 붙었다는 걸 대만이 모를리 없는데 손을 물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처럼 떨진 않았지만 손끝으로 심장이 옮겨진 듯 두근 거렸다.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미 대만은 태섭을 보고 있었다. 3점 라인에서 림을 바라보던 순간처럼, 오로지 태섭만을 향하고 있어서, 심장은 손가락 끝이 아닌 왼가슴에 박혀있음을 알게된다.
남자가 림을 바라보고 난 뒤에는 언제나 농구공이 그물을 통과했다. 그럼 지금은? 또 바보같이 바라만 볼 것 같아 태섭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고등학생 때 품었던 여린 풋사랑이 지금 다시 살아난걸까. 유효기간이 있다면, 한참 지났을 그 감정이 꺼질 일 없던 불꽃처럼 다시 타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되려나.
살짝 씁쓸하면서 밀과 과일 향이 섞인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불 붙지 않게 가슴 깊이 고스란히 묻어뒀을 뿐인 감정이란걸 알면서도 태섭은 애써 부정한다. 고작 손끝이 닿았다고 해서, 서로의 눈을 맞췄다고 해서 선후배 외의 다른 관계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아마, 태섭의 키가 175를 넘길 일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바꿀 수 없다면 빠르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있는 법이다.
태섭의 오기가 취기와 함께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권준호가 너 온다고 얼마나 바빴는지 몰라."
"준호 선배가요?"
"농구부 애들한테 연락 싹 돌리고 나랑 채치수한테도 따로 보냈어."
"그러지 않아도 연락할텐데…"
목 뒤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나한테도 하려고 했어?"
사냥에 성공한 늑대처럼 사정없이 물어오는 정대만 때문에 사레들릴 뻔한 태섭이 쿨럭거렸다.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냈다. 당연히 주장, 준호 선배, 달재에게는 했겠지. 솔직히 달재에게는 한국에 돌아오기 석 달 전부터 말했고. 중에 정대만이 없는 이유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태섭이 맥주나 홀짝이고 답은 없자 대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플라스틱 의자가 뒤로 밀려나면서 요란스럽게 소리질렀다.
"너, 인마! 안 하려고 했지?!"
"…선배한테 내가 왜."
"내가 너 사 먹인 돈까스가 몇 접시고 삼각김밥이 몇 개고 갈비만두가 몇 판인데!"
"쪼잔하게 고딩 때 사준 거 가지고 큰소리예요?"
"이 자식이…."
오늘 산 맥주도 포함해야지! 계좌 알려주면 입금해드릴게요. 어떻게 하나도 안 지려고 대드는 것도 여전한지, 대만이 밀려난 의자를 도로 뜨르륵, 깕 끌고와 앉았다.
"어쨌든, 너랑 하는 첫 술자리가 편의점이라니."
"……."
"나야 어디든 상관없지만."
"……."
짝사랑은 아프다고들 하지만, 태섭에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아파하기도 전에 곁을 떠나야 했으니까. 오히려 미국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배 옆에 계속 있었다면 남들처럼 꽤 아팠을지도…. 힘들면 선배랑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며 버텼다. 농구에 대해서는 빠삭하면서도 백호 옆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남자. 억지를 부려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제멋대로인 모습에 자주 웃었었는데. 언젠가 겨우 알아듣기 시작한 영어가 가득찬 해변을 맨발로 달리며 생각했다. 선배를 좋아했던게 맞을까? 같이 있으면 너무 즐거워서 착각한 걸지도.
"널 좋아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여기며 살았는데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만난 남자의 짧은 말에 욕심이 생겨버리면. 내 마음은 부정해도 선배의 마음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면. 그럼 나는, 나는…….
화르르 타오르는 불 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다. 뜨거워진 피가 온몸을 돌고 돌아 얼굴로 몰려 터질듯해 고개를 들 수 없다. 코 끝이 맵고 입술이 움찔거려. 바꿀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 기회가 있는 거라면. 이 말만은 꼭 해야만 한다고.
"난 선배 좋아했어요."
기어들어가는 소리였는데, 제대로 들은 대만의 눈이 커졌다. 태섭이 테이블 위에서 손을 거두고 일어났다. 지금, 내가 무슨….
"선배도 내일 일정 있을텐데, 이쯤해요. 저도 이제 들어가…"
"폰 줘봐. 번호 남기게."
여기서 안 주면, 달재나 준호 선배 통해서 받아갈게 뻔하다. 게다가 얼마 안 가 코트 위에서 마주칠 텐데. 대만과의 자리를 파하고 싶은 태섭이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내밀었다. 받아든 대만이 번호 몇 자리를 빠르게 입력하더니 통화 버튼을 누른다.
"내 번호니까 저장해. 나도 저장해둘테니까."
한국에 와서 새로 개통한 번호까지 손쉽게 따간 대만은 도망가려 걸음을 뗀 태섭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티나게 움찔여 버렸다. 대만의 손은 뜨거웠고 조금 축축했다. 금세 옆을 따라 걷던 대만은 얼마 안 가 도착한 오피스텔 앞에서 "잘 자라." 짧은 인사만 남기더니 뒤돌아 멀어져간다.
꿈인가.
샤워기의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수증기로 뿌연 허공을 올려다봤다. 꿈은 무슨. 꿈 같은 현실이지. 밤은 깊어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불면의 밤을 헤메는 태섭은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처음에는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못 잤을 뿐인데, 정대만 때문에 불면증의 이유가 더 늘었다. 얇은 여름 이불이 태섭이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린다. 태섭이 기껏 버티려 감았던 눈을 한쪽만 슬금 떴다. 오른손 옆에 놓인 폰을 잡아 들었다. 엄지로 전원키를 한 번 눌러 화면에 빛을 띄우고 몇 번 스와이프하면 몇 건 없는 통화 내역에 찍힌 번호 11자리와 이름 석자가 눈에 박힌다.
정말 정대만은 뭘까?
머릿속이 온통 정대만으로 가득 차자마자 벨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진다. 놀란 눈으로 본 화면에 뜬 이름은 두 시간 전만 해도 몰랐을 번호의 주인이고.
"왜요."
— 너 자?
"아직…… 안 자요."
— 태섭아.
제 이름 두 글자를 이렇게 다정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또 타오르기 시작한 얼굴에 손을 얹고 웅얼거렸다.
"…응?"
전화 너머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남자의 숨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바닥만 한 폰 화면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잠깐의 침묵. 크흠, 음. 목소리를 다듬은 남자가 말한다.
— …몇 층, 몇 호냐.
트레이닝도 연습도 없는 날이다.
루틴에서 벗어난 하루라 그런가, 밤 11시만 되어도 곯아떨어지더니 자정을 넘겨서도 잠에 들 수 없었다.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인지 밤하늘의 달빛인지 알 수 없는 여린 빛줄기가 암막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아른거리는 게 유독 눈에 걸려서는.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길 몇 분, 얼마안가 대만은 침대에 바로 앉았다.
습관대로 협탁 위의 폰을 제일 먼저 확인한다. 몇 년이 지났어도 연락을 주고받는 그룹 채팅방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권준호, 채치수와 함께 있는 방이고 북산 농구부 애들 소식과 함께 나타나는 건 언제나 권준호였다. 재작년 강백호의 이적 소문이 농구계에 퍼지기도 전에 알려준 것도, 작년 가을 이호식이 선배들 보다도 먼저 장가간다는 소식도, 그리고 이번주에는 송태섭이 기나긴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도.
어쩌면 오랜만에 듣게 된 녀석의 소식에 잠 못이루는 밤일지도 모른다.
벌써 수 년이 지났는데, 태섭이 미국으로 떠나가던 날, 그 얼굴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쉬움, 기대, 걱정.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어지러운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표정. 아마 태섭이 바라본 자신도 같은 표정이었을지도.
무슨 사이였느냐고 물어도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일방적으로 시비걸고 쌈박질하며 서로 이빨이나 해먹다가 농구부로 복귀해서야 선후배라는 부르기 좋은 관계로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그해 2학기는 농구부에 유일하게 남은 3학년과 주장으로써 틈만 나면 붙어 있었고……. 태섭은 1, 2학년들 연습 메뉴도 짜면서 대만의 학업까지 신경썼다. 자기 일보다도 농구부 운영에 더 꼼꼼이었다는 뜻이다. 저학년일 때에는 다람쥐, 인터하이까지는 코요테 같던 녀석이 기개 만큼은 호랑이처럼 보이려고 무리하는 걸 보면 미간이 좁아들다가도 나날이 성장하는 녀석을 보면 기특하다 못해 예뻤다.
예쁘다니, 운동하는 시커먼 남자 놈에게 할만한 감상은 아닌데. 제 정신이냐? 침대에 누워 머리를 뜯던 열아홉의 대만은 또 태섭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차라리 예쁘다는 것에서 끝났다면 괜찮았을 텐데. 3점을 넣지 않아도 웃어주는 둥근 얼굴이 특별해져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낸 대만은 거실로 느리게 걸었다. 송태섭 때문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소파 위에 던져뒀던 옷으로 순식간에 갈아입은 남자는 현관 거울 앞에서 머리를 한 번 다듬고 나섰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해가 진게 고작 5시간 전이라 그런가. 여전히 뜨끈한 대기가 지긋지긋해 시원한 캔맥주라도 들이키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종소리가 난다. 대로변에 있는 편의점이어도 자정을 넘기면 조용했다. 그래서 마음놓고 모자 없이 온건데, 냉장고가 줄지어 놓인 곳에 누군가 있었다.
키가 대만의 가슴까지 오는 남자였다. 헤어밴드로 올린 곱슬 머리며 분위기가 닮아서 착각이라 여겼다. 그도 그럴게, 대만은 방금까지도 태섭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남자도 맥주 때문에 편의점에 온 것 같았다. 대만이 그 뒤에 섰다. 나이키 로고가 등에 박힌 헐렁한 나시티. 몰래 내려다본 남자는 눈을 반만 뜨고 입술을 내민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대만이 몇 년 며칠을 그리던 사람과 같은 버릇을 가진 남자.
착각이 아녔다.
송태섭이었다.
눈앞에서 무방비하게 캔맥주를 홀짝이는 녀석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본 송태섭은 열아홉이었다. 그 시절 대만은 이미 대학생이었고…. 그렇구나, 이 녀석도 이제 어른이라고.
여기서 놓치면 더는 기회가 없을거다. 태섭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느려지는 이유는 분명 그런 생각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는 기회인 줄도 모르고 널 보냈다. 태섭을 한 번 떠나보내고 그대로 어른이 된 대만은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섭을 올려보낸 오피스텔이 다시 눈에 보여서야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었구나. 숨이 더 차오르기 전에, 태섭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너도 내 생각을 하고 있냐고.
내가 너에게 가도 되겠냐고.
문이 열리고 들여놓은 가구가 몇 없는 태섭의 집에 대만이 들어섰다. 여름 새벽을 달려오느라 이마며 목덜미에 땀이 흘러도 훤칠해서 태섭의 입술이 또 불퉁해진다. 그리고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후회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마신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녔던 게 분명하다. 감정이 앞서서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다 선배를 들이다니. 안으로 들어온 대만은 태섭의 고민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욕실부터 찾았다.
씻고 나온 남자는 불꺼진 침실의 가장 안쪽, 여름 이불이 거의 바닥에 흘러내린 침대를 본다.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 급했나. 몇 층, 몇 호인지 속삭이듯 알려주던 태섭이 귀여워서 웃으니 옆에 있던 태섭은 대만을 흘겨본다. 또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이제 자 자."
술도 마셨고 좋아한다 고백한거나 다름 없었으며 땀은 씻겨냈다. 또다시 느껴보는 감정에 심장이 뛴다. 사귀자는 말은 없었지만 같이 자는 게 정대만에게는 익숙한 일인걸까. 급하게 사느라 사이즈가 애매한 더블 침대에 둘이서 잠 잘 수 있는걸까.
…선배가 안고 자면, 괜찮을지도.
벌써부터 안고 안길 생각을 하다니, 다 틀려먹었다. 태섭이 떨리는 손을 주먹쥔 채 침대에 걸터 앉고 기다렸다. 대만은 열린 침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태섭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손톱이 예쁜 손가락이 전등 스위치에 닿는다.
불을 끄고 다가온 남자는 태섭의 옆이 아닌 침대 아래에 앉았다. 응? 태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둠에 묻힌 대만을 내려다봤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는다. 베개 없이 잠을 청하려는지 팔 한쪽에 머리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태섭은 깜깜한 눈앞에서 부스럭거리며 자려는 대만의 형상을 여러 번 쫓다가,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내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대만의 긴 몸뚱이의 윤곽이 보인다. 십대 때보다 넓어진 어깨라던가, 살짝 두툼해진 흉통이라던가. 그리고 반바지라 드러난 무릎과 허벅지.
"선배?"
집에 쳐들어와서는 바닥에 누워? 불렀는데 대답도 없고?
"선배."
침대 위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가득찬다. 베개와 이불을 품에 가득 끌어안은 태섭이 침대 아래로 스르륵 내려왔다.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바닥과 정대만의 뜨거운 몸이 동시에 느껴진다. 대만을 등 뒤로 하고 옆으로 누운 태섭이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기대하게 만든 정대만의 잘못이다. 제 몫의 침대는 버려두고 굳이 내려와서 옆에 눕게 만든 것도. 전부다.
"…하여간."
태섭의 등이 대만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태섭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베개는 뺏기고, 대신 대만의 팔이 쑥 들어왔다. 두 사람이 맞물리듯, 딱 붙어서 열기가 돌았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불이 몸과 마음에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절대 꺼뜨릴 일 없다는 듯.
얇은 이불은 발치로 치워졌다.
작은 몸을 더 안쪽으로 바짝 당기는 손이 다정하면서도 묘한 의도가 있다 여기며, 태섭이 눈을 감았다. 날개뼈 바로 뒤에 대만의 심장 박동이 붙었다. 대만도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든다. 숨을 느리게 내쉴 때마다 가슴이 살짝 부풀어 오르다 내린다.
다행히 창 너머는 아직 어두운 푸른빛이다.
불면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