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면 안될 이유
“주말에 뭐해.”
“이번 주요?”
대만이 간짜장을 크게 한입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찍이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운 태섭이 폰을 들어 슥슥 몇번 엄지로 문지르더니 캘린더를 들여다봤다. 고등학생이 나갈 수 있는 농구 경기는 가을 체전이 마지막이나 다름없으니, 훈련과 연습경기로 꽉 차 있던 캘린더가 지난 체전 경기를 마지막으로 텅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월화수목, 주간의 절반 이상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일정이 눈에 들어온다. 「시험 기간」.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할까 맨 앞에 「대만 선배」 네 글자는 쏙 빼놓고 적어둔 것이었다. 태섭이 눈을 가늘게 뜬다. 폰을 슬쩍 기울이고 대만의 얼굴을 보며 그가 주말 일정을 물어본 이유를 가늠해본다. 9월 말부터 이런 저런 일로 못 봤으니까 이번 주말은 저랑 있어야 하는 것 아니느냐는... 지극히 정대만스러운 이유.
“… 나 다음주 기말인데요.”
“너,”
어차피 특기자로 다 정해진거 아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대만은 참고 삼켰다. 때 되면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말해줄거라 여겼고, 송태섭은 제 감정 만큼이나 사적인 것도 극도로 말을 아끼는 놈이란 걸 잘 알았으니까. 굳이 부러 긁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어? 기껏한다는 변명이 기말고사라니.
애초에 체육특기생인 놈이 고3 2학기 기말고사를 감히 입에 올려? 나도 바로 작년까지 입시했던 놈이라고. 뭐 최저는 맞춰야한다지만.
대만이 턱을 손에 받치고 태섭을 한 번 본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 정대만에 한해서는 열정적으로 대하는 귀여운 녀석. 남이라면 흘려들을 정도로 가볍게 말한 일정을 캘린더에 전부 기록해놓고 '대학 보내놨으니까 경기 이겨요.’라 아침에 톡할 정도로. 바보같은 송태섭. 숨겨도 자연스레 티가 나는 것도 모르는지... .
대만이 군만두 하나를 집어 들어올리자 이번에는 후배 녀석이 어느새 이쪽을 보고있다. 절절하게도 반짝이는 둥글고 큰 갈색 눈동자로 2개월만에 본 선배의 얼굴이 아닌, 바삭하게 튀겨진 노르스름한 군만두를. 지긋이. 뺏긴 거나 다름 없이 양보해주니 좀 더 표정이 밝아지는 녀석을 미워할 수도 없고.
"감사요."
고교 마지막 기말고사는 어림도 없는 변명이란 건 태섭도 알고 있었다. 지 대학 시험 끝났다며 목요일 오후부터 학교 정문에서 농구부 주장을 기다린 남자, 정대만에게는 특히나 씨알도 안먹힐 거란 것도. 마지막으로 본게 두 달하고도 삼일이 됐나. 조금 길었던 머리를 짧게 다듬은 게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아마… 이번 주는 괜찮아요.”
“니가 안 괜찮다 말했어도 내 맘대로 할 생각이었어.”
“그래서 왜요?”
“캠핑가자.”
“캠핑?”
“어.”
대만이 준 만두의 절반을 씹어 우물거리다 태섭이 눈을 껌뻑였다. 그 뭐야, 텐트치고 불 피우는 그 캠핑이요? 그래 그 캠핑.
“선배랑?”
“왜. 달재나 영걸이도 불러서 같이 갈까.”
“아뇨.”
제안한 건 분명 정대만인데 "송태섭….", "태섭아…." 하고 원망스럽게 저를 쳐다보는 영걸 선배와 달재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자 잽싸게 답했다. 아쉬운대로 군만두 대신 반달로 얇게 썰린 단무지를 와작와작 씹는 남자는 별 생각 없어보인다. 그래 인마, 이미 답은 정해졌어. 또 그 조그마한 머리로 뭘 그렇게 고민하는 지. 어차피 갈 거잖아. 남자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시선이 교차하자 모든 생각이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텐트랑 장비는 다 있어.”
너는 몸만 오면 된다는 말에 흐응… 비음 섞인 소리를 냈다. 새하얗게 드러난 짬뽕 그릇 바닥에 중국집 이름 「제일반점」 이 궁서체로 박힌 걸 젓가락 끝으로 긁다가, 중국집 창문 너머 새카만 밤 하늘을 한 번 보다가 낮게 웅얼거린다.
있잖아, 선배는요.
“시험 끝났는데 저랑 놀아도 돼요?”
대만의 짙은 두 눈썹 사이가 그렇게나 빠르게 좁아드는건 처음봤을거다. 그럼 그 험악한 기세에 눌리기는 커녕 태섭의 눈썹은 기울기가 홱 달라지고.
“나 말고도 대학에 친구 많잖아.”
휘적 휘적. 입술을 댓발 내놓고 의미없는 젓가락질만 계속 했다. 대학생이 된 정대만이 후배 챙긴다며 서울에 있는 자취방에서 인천에 있는 북산고까지 찾아와 중국집 2만 2천원 짜리 절약 세트(식사 2그릇+군만두 4개)를 사주는 것도, 농구부가 있는 체육관까지 들이닥쳐 후배놈들 자세를 봐주거나 음료수며 아이스크림을 사와 먹이는 것도, 종종 공부를 핑계로 저를 자취방에 데려다가 교과서도 전공서적도 단 1페이지도 들춰보지 못하고 유튜브다 넷플릭스나 보며 뒹굴다가 근처 농구장가는 거… 뭐어, 다 그럴 수 있다.
체육관 앞에서 시비걸고 옥상에 불러내 때리고 못되게 굴었던게 마음에 걸려서였든. 아니면 반년간 같이 농구해보니까 송태섭이가 생각보다 꽤 재밌고 흥미로웠던거든. 일그러진 고교 선후배 관계로 시작점을 찍은게 마음에 안들어서 적어도 마무리는 좋은 선배이고 싶은 마음에… .
전부 다 그럴 수 있다고.
왜냐면 그 「정대만」이니까.
선배는 얼마든지 지좆마음대로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내가 「송태섭」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좋던 싫던 내색도 못하고 그저
정대만이라서 견디고 버틸 수 밖에 없는데… .
이제는 꽤 까마득해진 중딩 시절, 집 근처 코트에서 함께 했던 그의 농구를 기억해본다. MVP 메달을 깨물고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던 모습도, 방황하며 꼴보기 싫었던 긴 머리의 모습도, 코트 위에서 태섭이 주문하면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던 모습도, 졸업식 날 졸업장을 들고 날 대학보내준 건 너라며 개구지게 웃던 모습도 떠올린다.
그런데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답답하다. 어른이 된 정대만을 가끔 만나면 태섭은 버티는게 고되다 느껴져서.
지금은 대만이 제 아무리 북산에 자주 찾아온다해도 이전처럼 매일 보는게 아니다. 연락도 그만큼 줄었고 답장해오는 텍스트 길이도 짧아졌다. 이제 스물하나를 앞둔 대만에게는 그 흐름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고등학교 3학년의 후배 송태섭은 유치하게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좋아하던 걸 티내지 않으려 열심히 버티던 것을 놓아버릴 것만
같다. 작년 몇 개월 내내 붙어다녔더니 대만의 좆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성질이 고스란히 옮기라도 한건지.
그치만. 모르는 정대만이 많아지는 게 싫은 걸. 선배한테서 여태 맡아본 적 없던 스킨 냄새가 나거나, 어느 날에는 여자 향수 향기가 대놓고 나는 게 싫다.
대만의 자취방에서 새로 샀다는 농구화 끈을 다듬어주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공교롭게도 대만의 폰이 태섭의 오른편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었고. 삼성 갤럭시 최신 기종이 우렁차게 울어대는데 안볼 수가 있나. 화면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수진이(동기)」 라 적혀있었다.
나는 「송태섭」인데, 수진 누나는 「수진이」였다.
벨소리를 들은 대만이 비적비적 걸어와 이름을 확인하고서 받을 생각이 없는지 전화를 부재중으로 넘겼다. 그리고 원래 있던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자마자 우렁차게 다시 울리더니 이번에는 「지나 누나(nn학번)」 괄호 포함 열글자가 떡하니 떴다. 대만은 마찬가지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폰을 내려놨다. 수진이, 지나 누나. ...태섭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다 절반으로 줄어들고 시선은 바닥에 고정됐다.
그날 밤 잠에 들지도 못하고 태섭은 한참을 뒤척였다. 선배는 대학에서도 인기 많겠지? 여자들이랑 원래 자주 연락하나? 말은 안했어도 고백도 꽤 많이 받았겠지? 데이트도 하고 술도 마셨을까? 제대로된 연애 경험이 없는 태섭은 감히 그 이상으로 상상하는 것 조차 힘들었다. 질투하는 마음이 미지근한 물에 수비드 되는 고기 마냥 익어가다 대만의 얼굴을 그리기만해도 자작하게 끓어올라 타들어갔다.
이대로는 송태섭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 겁이 덜컥났다. 극단적이지만 지금은 선배를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말자고. 그래야만 앞으로의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볼래? ]
어느때처럼 만나자며 대만이 묻던 가을 날에 태섭은 답지않게 길디 긴 톡을 적어 보내며 거절했다.
[ 선배도 알겠지만, 지금은 곧 있을 체전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요. 1, 2학년들이랑 따로 아침 저녁으로 훈련하기로 약속도 했고... .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
[ 그리고 선배도 곧 시험 아니던가? 그럼, 당분간 연락도 어려울 듯. ]
[ 나중에 봐요. ]
그 뒤로는 슬슬 톡오던 것도 시간을 두고 흐린눈 해가며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잠수타려는 그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챈 정대만이 오늘은 연락도 없이 북산고에 직접 행차하신거였다. 태섭이 대만을 피하기 위해 써먹었던 체전과 시험을 고스란히 이용해서 말이다. 그 모든게 끝난 12월의 대학생과 고3을 위한 휴식이라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를 가지고.
✶
송태섭과 계속 엇나갔다.
아니지, 정확히 하자.
엇나간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녀석이 미꾸라지처럼 날 피한거지.
2개월 전 대만의 경기가 있던 날 아침 7시에 보내온 카카오톡이 태섭으로부터 온 마지막 연락이었다. 기분좋게 이긴 경기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전화도 안받고 보낸 톡도 메시지도 전부 읽씹까지 하더니, 나중에는 아에 읽지도 않는다. 이거 또 혼자서 무슨 대단한 고민을 하고 있는건지. 대만이 말풍선 옆에 사라지지 않는 조그마한 숫자 1을 매섭게 노려보다 짧은 숨을 내쉬었다.
대만은 태섭과의 이 애틋풋풋한 썸, 달리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관계를 빨리 쫑내고 싶었다. 내가 걔의 남자친구가 되고 걔가 내 남자친구가 되는 걸로.
강의실에서 기말 시험 준비는 커녕 송태섭이랑 어떻게해야 대놓고 연애질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을 온통 차지했는데 옆자리에 동기놈이 시기적절하게 비슷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도 안썼을텐데, 귀가 절로 기울여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동기들이 대만의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다들 한마디씩 거들더니, 썸타는 애랑 합을 맞춰보는데 캠핑이 좋다며 열창을 하던 건 동기 중 제일 나이 많은 놈의 아이디어였다.
"응? 정대만. 듣고있냐? 대만아. 캠핑이 뭐냐? 같이, 함께 집도 짓고 밥도 해먹고 둘을 가려주는 건 오직 얇은 천 뿐인 좁은 공간에 함께 누워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드는 것 아니냐."
마지막 문장을 유독 길게 늘어뜨리며, 저질스럽게 뜬 눈으로 얼굴을 들이밀으니 대만의 옆에 있던 다른 동기가 그 얼굴을 우악스럽게 잡아 멀리 밀어낸다.
“여튼 모텔보다 더 한게 캠핑이라고.”
“이 새끼. 썸이라 해놓고 결론이 왜 그래.”
징그럽다던가 변태 아니냐며 타박하는 이도 있었으나 솔직히 대만은 꽤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단 둘이서 연말 여행가는 느낌도 있고… 곧 크리스마스고. 대학 시험이 끝날 때쯤이면 태섭의 고교 체전도 대학 입시도 대부분 다 마무리되었 텐데. 은근 주변일에 쉽게 스트레스 받는 녀석이니까, 조금 멀리 나가서 한 숨 돌리게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캠핑가자는 말을 하면 입술을 내밀고 불만을 표하다가도 기대감에 찬,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절로 그려졌다.
… 그리고.
… 뭐어, 되면 손도 잡고.
… 뽀뽀도 해보고.
… 하는거지.
북산에 간다고 연락하면 씹히거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잽싸게 튈 걸 알아서, 자칭 「무소식은 희소식(?)」 전략으로 북산고 앞에서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을 죽쳤다. 죽이 10인분 정도로 팔팔 끓어갈 때 쯤 태섭이 교문을 나왔고 그게 한 여섯시였나. 11월만 해도 여섯시면 하늘이 밝았던 것 같은데, 12월은 금새 주변이 어둑하다. 학교 앞 도로를 밝히는 저녁 가로등이 팟, 밝게 켜지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 가로등 아래에서 사복 차림으로 담벼락에 삐딱하게 기대서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여력하다.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도 빠져나와서는 뒷걸음치며 주춤거리기는. 그 모습을 보고 대만이 입꼬리를 한 쪽만 올리며 웃었다.
“체전 고생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야, 오랜만이다. 그렇게 읽씹하더니 잘 지냈냐. 못 본사이에 키는 좀 컸나 했는데 그대로네. 이런 말 대신 고딩 적 자주했던 말을 골랐다. 정대만의 등장에 흔들리던 눈동자는 멈췄지만, 도톰한 입술이 투웅 튀어나왔다. 이제 더이상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인정했는지, 뚱한 얼굴로 대만의 옆으로 저벅저벅 다가와 중국집까지 나란히 걷는 게 귀여워 머리를 헝클였다.
“좋게 말할 때 그만해요.”
팔을 들어 휘적휘적 쳐내고 투덜거리면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빗어주듯 도로 뒤로 넘겨줬다. 만져주는 그 순간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녀석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또 웃음이 샜다.
“어엉, 안 할게.”
토독, 토도독.
[ 근데. 캠핑가서 뭐해요? ]
[ 텐트 치고 밥하고 하는거지 뭐. ]
마음을 칼로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대만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가로등 빛 아래에 음영으로 도드라진 그 얼굴을 보고 멈칫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될지. 게다가 지난 2개월을 꾹 참아가며 전화도 안받고 톡은 읽씹하니 죄책감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차에, 보자마자 하는 말이 '고생했다' 라니. 졸업한지 1년이 다되어가는데도 송태섭의 인생에 선배 자리를 영원히 꿰찬듯한 다정한 말로.
게다가 캠핑이라는 생각치도 못한 제안에 태섭의 연락 두절 계획은 완전히 무산 되었다. 캠핑에 대해서 아는게 전혀 없으니까 먼저 물어볼 수 밖에 없잖아! 농구나 음악듣기 말고는 다른 취미같은게 있던 것도 아니니 유튜브며 인스타에 「캠핑」 태그 키워드로 검색하던 태섭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캠핑… 괜찮을까?
창가에 머리를 기댄채 하늘에 뜬 달을 한 번 보고 재수없을 정도로 잘생긴 정대만 얼굴 한 번 떠올리고. 생각해보니 1박 2일로 자유 여행가는게 처음 아닌가? 선배랑 가는거니까 쬐애끄음 재밌을 것 같기도…? 농구부 합숙도 전국 대회도 수학 여행도 아니고 선배랑 같이 동해 바다 노지 캠핑장에서… … .
자, 잠깐만.
정대만이랑?
단, 둘? 이서?
외박?
외애애바아악? 톡을 주고받던 폰을 내리고 손이 아플 정도로 꽈악 쥐었다.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로는 두 뺨에 열기가 차오르는게 가시지 않아 찬물로 세수를 하고 와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 밥은요? 직접 해 먹어요? ]
[ ㅇㅇ ]
[ 뭐 해먹지. ]
[ 대충 해줘. ]
[ 무슨ㅋ 결혼한 지 20년 된 아저씨 같음 ]
[ 그럼ㅋ 니가 내 마누라? ]
‘마누라’ 세 글자에 화들짝 놀라 이번에는 폰을 내던질 뻔했다. 그리고 입꼬리가 샐룩 올라가길래 또 폰을 꽈악 쥐어 손가락 마디가 저릴 정도의 고통으로 정신차렸다. 미친. 정대만 미쳤나. 마누라같은 소리 하네 진짜. 그리고 왜 내가 마누라야? 대만의 큰 의미 없이 한 말에 가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것도 중증이다. 화장실에 호다닥 달려가 다시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찬물로 식혀본다. 눈을 질끈 꾹 감았다. 스마트폰을 내려둔 바닥을 타고 짧은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또 무슨 말을 보냈을까.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며 오른쪽 눈만 슬쩍 떠 화면을 확인했다.
[ 농담 ]
화면에 미리보기로 뜬 짧은 두 글자를 눈으로 새긴다. 얼음장 같은 찬물로도 소용 없던게, 고작 4byte 두 글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차 싶어서… . 이래서 진심으로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걱정부터 앞섰던 건데.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하며 기대하고 실망하고 아파하고… . 괜히 입시생에게 연애가 독이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하필, 그 정대만을 좋아하게 되다니. 하하하… 몇 개월 뒤의 자신을 생각하면 절대 안될 일이라고. 앱 화면에서 말풍선 옆 숫자 1을 없애기 전에 자정가까이의 짙은 밤하늘을 또 올려다봤다.
[ 라면도 상관없죠? ]
[ ㅇㅇ ]
그렇지만 이제 와서 안간다고 할 수도 없다.
"정말로 마지막이니까."
캠핑을 위한 장비라고는 몸뚱이 뿐인 태섭은 마지막으로 선배 먹을 거라도 잘 챙겨주고 싶었다. 우리 둘 다 운동하니까 고기나 종류별로 실컷 먹을까. ...밥도 지어야하나?
[ 토요일 아침 9시에 데리러 갈테니까 1층에 내려와 있어. ]
그날 마지막으로 온 대만의 톡을 확인하고 화면을 점멸했다.
✶
토요일 오전 9시. 대만은 정씨네 SUV를 끌고 정각보다 10분 정도 빠르게 태섭의 집 앞에 도착했다. 1층에는 루즈핏 기모후드에 살짝 짧은 점퍼를 걸친 송태섭이 더플백을 메고 소형 아이스박스를 발밑에 두고 이미 대기중이었지만. 추위에 코 끝이 발갛게 된 태섭이 조수석에 올라타려 문을 잡아 당겼으나 잠겨서 덜컥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뭐야?"
한 쪽 눈썹이 무섭게 기울어지자 조수석 창문이 지이잉— 내려간다. 운전석에 앉은 대만의 얼굴, 눈썹 중앙이 11자로 좁아든게 참으로 못난 표정이다. 못마땅한 시선이 차 밖에 선 태섭을 위아래로 느리게 훑는다.
"왜요."
"올라가서 다시 옷 입고와. 롱패딩으로."
"엥? 나 충분히 따뜻,"
"깝치지말고 다녀오세요. 어서."
더는 듣지 않겠다는 태도로 대만이 다시 조수석 창문을 올린다. 이번에 새로 산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그자리에서 입술을 주욱 내밀고 투덜거리던 태섭은 하는 수 없이 집에 다시 올라갔다. 주말 이른 오전부터 집 현관이 두 번이나 열렸다 닫히니, 막 일어난 아라가 거실에서 의아하게 태섭을 바라본다.
"왜 다시 왔어?"
"…그런게 있어."
짧막하게 대답하고 방에서 나온 태섭은 두고보자는 마음으로 목도리에 장갑, 등 뒤에 북산이라 프린트된 검은 롱패딩까지 껴입는다. 오동통한 묵은지 참치 김밥마냥 무장한 오라비를 보며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아라가 어디서 핫팩을 꺼내와 태섭의 롱패딩 주머니에 넣어준다.
"잘 다녀오라구우. 올 때 속초에서 만석 닭강정 사오는거 잊지 말고!"
"알았으니까, 넌 잠이나 더 자라."
다시 내려왔을 때에는 두고간 짐을 트렁크에 싣고 있는 남자의 등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이제 됐어요?" 등 뒤로 들려오는 투정가득한 목소리에 대만이 뒤돌아 본다. 팔뚝을 잡고 빙그르 한바퀴 뒤뚱뒤뚱 돌려가며 제대로 입었나, 확인하던 남자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히터로 후끈해진 차내 공기에 새로 걸쳤던 모든 옷가지를 도로 벗을 수 밖에 없어서 짜증이 났지만. 별다른 말 없이 대만이 먼저 손을 뻗어 롱패딩이며 목도리를 받아내 뒷좌석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일으킨 몸을 그대로 태섭 쪽으로 바짝 기울여 안전벨트를 대각선으로 끌어와 고정한다. 가까워진 높은 콧대에 두 눈이 고정되어 온몸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거든요? 내가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애인 생기면 애인에게나 하라고요. 따지고 싶은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지만 대만의 머리가 가까이 다가온 그 동안에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열선에 뜨끈해진 시트에 등과 엉덩이가 녹아들 것처럼 온 몸이 노곤노곤해진다.
남자가 운전하는 모습을 몇 번 흘끔거리던 녀석이 말 한마디도 없이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정면만 보고있는게 20분을 넘어간다.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대만이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마자 말을 걸었다.
"옆에 앉았으면, 어디 휴게소가 맛있는지 알아보고 그러는거야."
"…흥."
"그게 대답이냐? 선배가 말을 하는데."
"졸업해서 북산 사람도 아닌 정대만씨의 말을 제가 왜 들어야하죠?"
"이게 한마디도 안지려고."
전방주시 중이던 대만이 손만 오른쪽으로 쭉 뻗어와 태섭의 얼굴을 전면을 더듬다 볼을 잡아당긴다. 보기보다 더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엄지와 검지에 잡혀 주욱 늘어난다.
"그럼. … 애ㅇ, 아니 친한 형 … 말은 들을거냐?"
태섭이 송곳니를 드러내더니 볼을 잡아낸 두 손가락을 콱 물었다. 악! 소리와 함께 손을 내빼더니 탈탈 털어내는 남자를 노려본다. 운전에 집중이나해요.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가고요."
떡볶이, 소떡소떡, 알감자버터구이. 거진 한상차림이었다. 모처럼의 여행에 빠질 수 없는 휴게소 간식이니 대만도 꽤 먹었는데, 태섭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음식들에 허탈하게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어서. 이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진짜 잘 먹어. 그래서 불만? 아니 더 많이 먹어라. 아침도 안먹고 몇시간 째 차 안에 갇혀 배가 고팠나, 소떡소떡의 소세지랑 떡을 쇽쇽 빼먹던 태섭의 눈에 생기가 돈다. 무슨 식탐 많은 똥강아지도 아니고, 중국집에서 군만두 뺏어먹었을 때랑 똑같이. 이것도 먹어라. 대만이 떡볶이 오뎅과 떡을 이쑤시개로 한 번에 콕 찍어 태섭의 입 앞에 내밀었다. 합, 받아먹고 우물우물. 추위에 발그레해진 볼을 부풀려 움직이는게 귀여워 한참을 또 구경했다. 똥강아지가 아니라 다람쥐에 더 가까울지도.
"나도 줘."
입을 벌린 남자가 벌린 입에 손짓한다. 태섭이 적당한 크기의 알감자를 골라 위에 잔득 묻은 설탕을 살살 털어내 대만의 입에 넣었다. 혀 끝에 닿는 달큰 짭짤함과 포슬거리는 감자가 꽤나 맛있어서 하나 더 집어먹으려는데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왜?”
“…아뇨.”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여서요. 태섭이 눈을 감고 똑같이 감자 하나를 말과 함께 집어 씹었다. 오늘은 더, 말 실수하지 않게 신경써야한다. 내 마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감자에 목이 메인건 어떻게 알았는지 대만이 마시던 콜라를 내민다. 고작 콜라 몇 모금에 답답했던 속이 따끔따끔 풀려내린다.
도착한 바닷가 근처 노지캠핑장에는 이미 텐트 두 채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있었다. 주중에 내린 폭설에 방풍림으로 조성된 커다란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같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겨울 바다의 으스러지는 파도 소리와 가까운듯 먼 어딘가에서 들리는 익숙하고 오래된 캐롤. 차에서 먼저 내린 태섭의 내쉰 숨이 새하얗게 피어난다.
"추워."
롱패딩에 고개를 묻고 파르릇 떨자 대만이 뒷좌석에 놨던 목도리를 가져와 머리를 둘둘 싸매 묶는다. 반절만 뜬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 본다. 선배가 더 추워보이는데, 맨손에 목도리도 없고… . 태섭이 패딩 주머니에 넣어놨던 장갑을 꺼내 끼더니 목도리를 도로 풀고 발꿈치를 들어 대만의 목에 둘렀다. 기껏해줬더니? 듣기 좋은 목소리는 바로 조여맨 후드 덕에 못들은 척 할 수 있었다.
“짐 옮기자.”
대만의 부름에 차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옮겼다. 힘쓰는 건 자신있다고 몇 kg씩 나가는 장비들을 덥썩 덥썩 집어 날랐다. 왼 무릎은 더이상 신경쓸 일 아니라며 몇 번이나 말했지만 조금이라도 선배에게 부담되는건 싫으니까.
대만이 삽을 꺼내들어 사이트에 얼어붙은 눈을 긁어 퍼내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가방에서 천이며 긴 막대를 절그럭 절그럭 꺼내고 펼치고 세운다. 말이 쉽지 텐트를 피칭하는 순서도 방식도 유튜브 2배속으로 보고 배운 태섭은 허둥대며 열심히 대만이 시키는 말만 따랐다. 마치 어린날 드리블을 처음 배우던 것처럼.
바닥 냉기를 차단을 이유로 텐트 전용 그라운드 시트랑 따로 가져온 방수포도 이중으로 깐다. 대만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이너텐트에 폴대를 X자로 교차해 끼운다. 둥그런 돔 형태로 모양이 그럴듯하게 잡히면 두툼한 플라이를 씌워 더 따뜻하게 한다. 텐트에 달린 로프를 잡아 당겨 강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텐션을 주고, 기다란 못처럼 생긴 팩을 땅에 꽂아 망치질 하는 것까지. 삼십 여분만에 꽤 넓은 텐트가 세워졌다.
태섭이 아직 아무도 밟지않은 눈 위를 뽀시락 걸어 뒤로 멀어진다. 완성된 두사람의 텐트를 올려다 보고 절로 벌어진 입 사이에서 아, 감탄이 났다. 장갑낀 손으로 패딩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폰을 꺼내 사진 찍는걸 보며 대만이 부드럽게 웃는다.
“오늘 우리 집.”
우리 집… . 대만의 말 때문일지 영하의 추위 때문일지 후드로 조여매 얼마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진 것 같다.
“앞에 화로 설치할테니까 나머지 짐도 안쪽으로 옮겨줘.”
“밥도 바로 먹어요?”
“텐트 안에 정리하고 불 피우면 바로.”
웅. 옹알거리는 대답이 들려오자, 대만이 텐트 입구를 열어준다. 태섭이 뒤뚱거리며 매트, 침낭, 물, 음식을 나르는 동안 캠핑용 의자와 화롯대를 척척 조립한 대만이 주변에서 나뭇가지며 솔방울 몇 개를 줏어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 몸을 낮추고 포대에서 잘마른 장작을 하나 꺼낸 남자는 나이프를 들어 불이 붙기 쉽게 잘게 쪼개낸다. 쩍, 쩍. 평소에는 들을 일 없는 낯선 소리에 태섭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등에 몸을 기댔다. 살짝 높은 어깨에 턱을 걸치고 힘을 싣어 누른다.
"야, 위험하잖아."
불을 다루는 커다란 손을 봤다. 그의 고교시절 별명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불꽃남자가 우물 정자로 쌓은 장작 더미 가운데에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넣고 토치로 불을 붙인다.
“능숙해.”
“어렸을 때 아빠 따라 몇 번 해본게 전부지만.”
타닥, 탁. 장작에 스며들었던 습기가 증발하면서 소리를 낸다. 눈이 묻었던 솔방울과 나뭇가지에서는 뿌연 연기가 피어나고, 주변 장작으로 불이 옮겨붙기 시작한다. 작은 불이 키워낸 따스함에 넋을 놓고 있는데 바스락 거리는 발소리에 태섭은 잽싸게 대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저기 죄송한데요.”
“거봐 언니, 동생이랑 온 것 같다고 했잖아.”
여자 둘을 향해 동시에 두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대만은 말대답 없이 무슨? 하는 표정을 짓자 언니라 불렸던 사람이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캠핑이 처음인데, 장작에 불이 안붙어서요.”
여자의 말에 대만의 옆에서 태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필? 우리한테? 불 붙이는 방법 같은 건 유튜브에 검색하면 수도 없이 나올텐데?
“한 분만 오셔서 도와주시면 꼭 보답해드릴게요.”
두명 중 한명이라면서 정대만을 왜 그렇게 빤히 보는건데. 태섭이 들리지않게 숨을 후, 내쉬더니 바닥에 놓여진 토치를 오른손에 들었다. 어차피 방금 선배가 불 피우는 것도 봤겠다. 내가 가도 될 것 같으니까.
“제가,”
“내가 갈게.”
대만이 태섭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어 뒤로 물리더니 손에서 토치를 뺏어들었다.
“금방 올테니까. 저녁 준비하고 있어.”
금방 온다 해놓고 정대만은 텐트를 떠난지, 40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불 위에 올린 냄비만 멍하게 바라보다, 대만과 여자 두명이 사라지던 방향을 지긋이 노려본다. 불 앞에 있어도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쏘시개용이라며 대만이 건내준 긴 나무 막대로 괜히 멀쩡한 불을 들쑤셨다. 발갛게 타오르는 장작을 툭툭 건들 때마다 작은 불씨가 팍, 팍 피어났다. 시커멓게 타들어 재가 되어가는 장작 더미가 제 마음 같았다.
선배는 다정한 사람이다.
나 말고 모두에게.
미숙한 후배들에게 험한 말을 하거나 우악스럽게 대했어도 선배 만큼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다정함을 자연스럽게 알게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에 대만의 방에서 봤던 수진과 지나, 태섭이 모르는 누나들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대만을 데리고 간 두 여자가 그들은 아니겠지만 대입하기에는 충분했다. 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셋이서 뭘하고 있을까. 정말 불이 안 붙어서 선배를 부른걸까. 그 여자들이랑 한 텐트에 들어간건 아니겠지… .
태섭이 일렁이는 불을 보며 코를 몇 번 훌쩍이다 딱 붙인 두 무릎사이에 고개를 묻었을 때 치이이익 물이 넘쳐 불 꺼지는 소리가 나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불 가운데에 올려놨던 냄비 전체가 불에 검게 그을려서는 새카만 연기를 뿜어냈다. 앉아있던 캠핑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탄내를 내뿜는 냄비 손잡이에 나뭇가지를 걸어 겨우 철판 가장자리로 빼냈다. 폴폴폴 퍼지는 연기가 매워 콜록거리며 눈가를 닦아낸 태섭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를 집 지키는 개가 된 것 같았다. 탄 냄비와 사그라든 불씨가 밉게만 보인다.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무언가 탁, 끊어지는 듯한 느낌에 텐트를 확 열어젖히고 태섭이 들고왔던 가방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마지막으로 대만과 단둘이서 오손도손 있을거라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몇 시간 전 함께 설치한 텐트를 보며 우리 집이라 했던게 꿈같다.
우리 집 같은 소리하네.
눈앞이 흐릿해지는걸 인정하기 싫어서 얼굴을 박박 문대던 태섭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대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더니, 텐트를 뒤로하고 어둑해진 소나무 숲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
50분이 지나서야 대만은 사이트로 돌아왔다. 떠났을 때 보다 한참 작아진 화력에 의아하기도 잠깐, 화로 앞에서 밥하며 기다리고 있어야할 작은 몸뚱이가 보이지않아 미간이 빠르게 좁아들었다.
"송태섭?"
이름을 불러도 사방 어디에서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텐트에 먼저 들어갔나 싶어 안쪽도 살펴 봤으나, 주인없이 버려진 텐트는 입구 지퍼도 안잠겨있고 램프도 안켜져있고… 무엇보다 녀석의 가방이 없다.
캠핑이 처음이라던 여자들은 거짓말은 아녔는지, 텐트며 타프도 설치된게 엉망이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장작더미는 생나무나 다름없어 불이 붙질 않아서 시간이 배로 걸렸다. 곧 갈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보낸 톡은 무슨 이유인지 읽지도 않고. 그대로 태섭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바로 [통화하기] 버튼을 눌러봤지만 몇 번의 통화음 끝에는 [연결이 되지 않아… ] 도움안되는 자동응답기 목소리만 들려왔다.
도대체.
"송태섭!"
너는 왜.
캠핑장에서 인근 해변까지 두 바퀴는 돌고 돌아 뛰어다니며 찾아다녔으나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한올도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이나 전화를 다시 걸어도 안받고… .
설마 혼자 돌아갔나?
설마가 아니지. 송태섭이니까 아무말도 없이 혼자 돌아갈 생각을 했을거다. 대만이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확인한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늦지 않는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거다. ’그래봤자 고딩이야.’ 라는 생각과 '상대는 송태섭이다.' 라는 생각이 번갈아 떠올랐다.
도대체, 왜 나를 떠나가지 못해 안달인건데.
마지막으로 캠핑장 주변을 다시 샅샅이 뒤져보고 주차장이 있는 캠핑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곧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둑한 가로등 빛 아래로 오르막을 오르는 익숙한 형태를 봤다. 새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이 사라지자마자, 애타게 찾아 불렀던 세글자를 다시 내뱉는다.
"송태섭."
"… ."
"너."
"… 선배가,"
"뭐?"
"선배가 탄 밥 먹는게 싫어서…"
장갑이랑 핫팩은 어쨌는지 새빨갛게 튼 맨 손이 달달 떨린다. 부시럭 거리며 패딩 안에서 꺼내 대만에게 보여준 건, 고작 라면에 햇반. 날 그렇게 두고 사라진 선배가 미워서 홧김에 돌아가려 했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또 거짓말을 둘러댔다. 아니, 절반은 진심이니까 완전히 거짓말이라 할 수는 없다.
나 혼자 돌아가면 돌아온 선배가 꺼진 불 앞에서 홀로 있을텐데. 분명 선배는 밥 같은 거 한 번도 지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으니까. 내가 엉망으로 태워먹은 냄비밥을 퍼먹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내일부터는 연락도 없이 그대로 남남이 되어… … .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 때에는 캠핑장에서 가장 가까운 OO마을 버스정류장을 향해 1km를 넘게 걸어온 태섭이었다. 핸드폰은 통화권 이탈로 시간만 확인 가능한 검은 벽돌이나 다름 없었다. 도로 끝에 바짝 붙어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는 식당도 카페도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편의점도 아닌 슈퍼 딱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다정슈퍼마켙.
띄어쓰기도 없이 들쑥날쑥하게 파랗고 붉은 글씨가 쓰여진 간판에 새하얗게 불이 들어와있었다. 추워서 코를 훌쩍이며 창 너머로 안을 살펴보던 태섭이 유리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말이 슈퍼지, 바다 낚시 용품이나 철물점에서 나 볼법한 날붙이들이 가득해 태섭이 고를 수 있는 게 몇 없었다. 결국 진라면(매운맛) 세봉지에 햇반 두개를 집어들어 계산했다.
대만이 다가와 온 몸이 눈사람처럼 차가워진 태섭을 끌어안았다. 이 바보같은 후배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더 힘줘서 안으니 라면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난다. 태섭이 품에서 움찔 거리면서 "선배, 라면… ." 뭐라 중얼거리는 말도 무시했다. 조그마한 그 얼굴을 내려다봤다. 따뜻한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싸고 들어올린다. 으우, 바보같은 소리를 내는 입술부터 혼내줄까 싶다가 고백도 없이 키스하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진 않았다.
"톡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고."
통화권 이탈이었어요. 몰랐어… . 뜨끔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다.
"바보냐."
"선배가 먼저 여자들이랑 사라졌잖아."
"그럼? 그 여자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널 보내?!"
"무, 뭐, 뭐라고요?"
작은 손 위로 손을 겹치고 입 가까이로 끌어와 더운 숨을 더했다. 심장 근처가 간지러운 걸 겨우 참아내며 몇 번 더 손등에 입을 내렸다. 이제 이런 짓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도망치는 널 붙잡는 것도.
제대로 도망도 못치는 널 보는 것도.
"널 다른 사람에게 뺏기는 바에… ."
태섭의 품에서 라면이랑 햇반을 뺏어들었다. 힘 없이 빼앗긴 후배 녀석의 표정을 끝까지 훑었다. 살짝 쳐진 눈썹,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빛나다가, 살짝 열린 도톰한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다 도로 닫힌다. 영하의 기온에도 얼굴은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졌다. 작은 머릿속이 내가 했던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해석하고 있는게 보였다. 코트 위였으면 찰떡같이 알아들었을 녀석이. 아니, 이미 무슨 뜻인지 알면서— 멍청이가.
"좋아한다는 거야."
빠져나갈 이유는 생각하지도 못하게 쐐기를 박는다.
"송태섭, 널 좋아한다고."
얌전히 텐트 앞으로 돌아온 태섭은 계속 말이 없었다. 꽉 잡힌 손을 한 번 보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너른 등을 보며 머릿속으로는 선배의 고백을 곱씹었다. 선배가 나를 좋아해? 정대만이 나를 좋아한다고? 농구부 후배를 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의미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캠핑 의자에 앉혀졌다. 태섭의 몸 위로 대만의 크고 넉넉한 패딩이 둘러진다. 남자가 의자 옆에 쪼그려 앉아 다시 불을 피운다. 태섭이 놓고가 거의 꺼진거나 다름없는 불씨 위로 마른 장작을 쌓아 열기를 키운다. 태워먹은 냄비는 화로 옆에 내려놓고 텐트 안에서 여분 냄비를 들고와 물을 붓는다.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기운에 태섭이 입을 열었다.
"그치만 선배… 북산에 와서도 나보다 다른 후배들한테 더 신경 많이 썼잖아."
"그래야 놈들이 널 덜 귀찮게 할테니까."
"… 계속 수진 누나랑 지나 누나가 전화하고."
"그걸 보고 있었어? 팀플 빠지고 너랑 집에만 있었으니 당연히 전화하겠지."
너는 여태 내가 너한테 잘해준 건 다 잊고 그런 것만 기억하는 거냐? 대만이 라면을 불쑥 내밀었다. 밥 해준다며. 입고 있던 패딩을 의자 위에 올려두고 라면 세봉지를 받아들었다. 팔팔 끓기 시작한 물에 스프를 탈탈 털어 넣고 면을 투하했다. 세봉이나 끓였는데 사라지는 데에는 순식간이었다. 자작해진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고 나서야 추위와 허기가 제대로 가셨다.
팍, 연소된 장작이 으스러져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하늘을 봤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마지막 장작을 던져 넣은 대만이 손을 내밀었다. 누가봐도 잡으라는 의도였다. 잡지 않고 버텻더니 손을 활짝 펼쳐 눈 앞 가까이에 들이민다. 눈썹 하나를 비틀어 올린 태섭이 그 손바닥을 주먹으로 퍽, 내려치고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잽싸게 숨겼다.
"귀여운 짓 좀 그만해."
눈 앞에 있던 손이 순식간에 주머니로 따라들어와 손목을 잡았다. 아악, 억센 힘에 캠핑 의자와 몸뚱이가 동시에 남자쪽으로 기울었다. 주먹 쥔 손 틈새로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와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온다. 몸을 바짝 붙어온 대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교복도 유니폼도 아닌 부드럽고 푹신한 섬유에 뺨을 부볐다. 부슬거리는 머리 위로 얹어진 머리의 무게를 느끼며 푸흐흐…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
"… 아무리 그래도 2인용 침낭은 좀."
"뭐, 침낭이 왜."
"침대보다 더 하잖아."
"더 하니까 갖고왔지."
태섭이 침낭안에서 버둥거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끊임없다. 어떤 표정으로 화내고 있는지 안봐도 알 것 같았다. 근데, 나는 진심으로 화내는 너를 이미 한참 전부터 좋아했거든.
"선배랑 사귈거라고는 안했,"
"사귈거면서. 나 엄청 좋아하잖아."
"아,"
"안 좋아해?"
살짝 잡은 턱을 돌려 눈을 들여다본다. 가장 낮은 밝기의 램프 불빛 사이로 눈맞춤을 한다. 날 안 좋아했다면, 나랑 얽히는게 진심으로 싫었다면, 애초에 이런 곳까지 단 둘이서 오지 않았을거면서. 왜 자꾸 인정하질 않는거야.
"… … 뒤로 좀 가봐요. 너무 좁아."
"야 침낭에 남는 공간이 어딨어. 그냥 붙어."
"아, 닿는다고요!"
고집센 녀석의 등 뒤로 가슴을 붙이고 다리 사이에는 무릎을 끼워 넣었다. 품에 쏘옥 들어오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크기감에 만족스러웠다.
"고딩 때에도 이렇게 안고 싶었어."
"산왕전 끝났을 때도 뒤에서 안았잖아."
부풀린 둥근 뺨이 슬슬 보이는 머리가 작게 움직인다. 야아, 이거랑 그거랑은 완전 다르지.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니 작은 몸이 놀라 움츠러든다. 바르릇 떨면서 버둥거리는게 귀여워서 혀로 슬쩍 핥아보기도 하고.
"비겁해, 이런식으로… ."
후—, 숨을 내쉰 녀석이 꿈지럭 거리던 걸 멈추더니 느리게 몸을 돌리고 마주보며 눕는다. 편하라고 뻗어준 팔에 머리를 뉘이고, 한 번 더 길게 내쉬는 숨. 따뜻한 숨결이 턱 아래로 스쳤다.
"… 그럼 이제 다른 사람은 안 볼 거예요?"
"너만 보고 있었어."
"…그런 말을 잘도 하네."
"너니까 하는 거야."
"… … 내가 멀어지면요?"
"응?"
"나, 아직 …선배에게 말 안한게 있어요."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마에 이마를 대고 응, 작게 대답했더니 도톰한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
"나 미국으로 유학가요."
몇 초간의 정적. 그 끝에 텐트 옆 소나무에 쌓여있던 눈이 바람을 맞아 바닥에 추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녹빛의 눈을 한 번 깜빡이고 갈빛의 눈을 들여다본다. 대만이 태섭을 다시 온 몸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벗어나지 못하게 팔에 힘을 준다.
"… … ."
"… … ."
얼굴이 맞닿은 가슴팍이 축축해진다. 직전보다 더 뜨거워진 숨이 녀석의 코와 입에서 불규칙하게 터져나온다. 약하게 들썩이는 등을 살살 쓰다듬고 도닥였다. 내가 선배 옆에, …오랫동안, 없어도… 금방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울음을 삼키면서 띄엄띄엄 꺼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도,
"…좋아, 해 …줄 거예요?"
농구냐 연애냐 물어보면 당연히 농구가 첫 번째일 너에게,정대만이란 존재가 눈물 흘릴 정도로 고된 걸까. 눈물로 젖은 축축한 뺨에 입술부터 가져다댔다. 이럴까봐, 말… 하기 싫었, 는데. 작게 웅얼거리다 입을 앙 다문다. 감긴 눈 끝으로 물이 계속 흘러넘쳐서 엄지로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울지마."
솔직히 내가 어떤 눈으로 널 오래 쫓고 있었는지 너도 모를리가 없는데. 반대로 니가 어떤 눈으로 날 보고 있었는지 모를 수가 없는데. 끊임없이 도망치면서도 계속 확인했던거야. 내가 다시 너를 붙잡아 주기를. 태섭아, 그런 모순이 어딨어. 나는 포기가 나쁜 놈이란 걸 니가 제일 잘 알면서.
"그게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될 리 없잖아."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해줄테니까. 마치 아기 강아지나 고양이를 만져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애정을 담아서 형태를 더듬는다.
"그러니까 너도 좋아하면 안될 이유 찾지마."
엄지로 입술을 뭉개듯 누르고 발갛게된 눈언저리와 뺨을 만져보고. 까슬까슬한 뒷머리, 귀와 이어진 목, 어깨와 등허리를 쓸었다. 침낭 안에서 눈을 마주 볼 만큼 올라온 태섭이 먼저 대만의 입술 근처에 입술을 붙였다. 츕 소리를 낸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분홍색 혀가 귀여워. 그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그쪽이 아니라고.’ 제대로 입을 겹치고 혀에 혀를 붙였다. 떨어지면 다시 붙어오고 어설프게 숨을 고르느라 다시 떨어지고. 긴 입맞춤에 어느정도 진정되었는지 헐떡임이 잦아들어 등허리에 두 손을 얹고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잡았다.
"…선배."
"응."
… …나 우는 거 보고 발기한거예요? 시끄러워. 좋아하는 녀석이랑 같이 누웠는데 안서면 그게 더 문제 아냐? 품에서 울다 말고 얌전히 안겨있던 녀석이 후끈후끈한 침낭안에서 버둥거리길래 다시 바짝 끌어 빈틈없이 하체끼리 맞붙였다. 야야, 비비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 변태냐고?!"
"니가 심각하게 귀엽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아익, 빨리 이것 좀 죽여봐요. 정대만 만큼이나 자기주장이 센 아랫도리가 허벅지며 고간에 닿아 꾸욱 꾸욱 반복해 누르길래 하지말라고 손을 가져다 댄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작은 손바닥 위로 부벼지는 부피감과 단단함에 놀라 빼내려하자 대만에게 손목을 세게 붙잡혀 그대로 고정된다. 힘이 왜이리 세. 헉, 소리에도 뭉근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어깨와 목 사이에 고개를 묻은 대만이 으르렁 거리듯 이름을 불렀다.
"… … 야아, 태섭아."
여태 성없이 이름 두 글자로만 부른 적 없던 남자가 귓불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싫어?’ 부들거리는 머리가 좌우로 절레절레. ‘그럼 해도 돼?’ 다시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에 대만이 웃는다. 싫은 건 아닌데 하지는 말라고? 그럼 어떡하냐… .
“차, 참…아요.”
겨울 날 텐트가 이렇게 뜨거워도 되나. 대만이 더운 숨을 뱉더니 아랫입술을 물어 씹고 태섭을 가만히 본다.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인내심을 다잡기 위해 등허리에 올랐다. 옷 안으로 들어온 뜨거운 손바닥이 바작 긴장한 기립근에 닿자마자 데이는 줄 알고 또 움찔였다. 손끝이 척추선을 따라 날개죽지까지 느리게 오르더니 다시 내려와 오른 엉덩이를 양손으로 주무른다. 여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황홀한 감각이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좆터져서 죽은 사람도 있을까.
"대만 선배애... ."
대만에게는 참으라던 태섭이 목에 팔을 두르고 애타게 찾아 부르더니 겁도 없이 입술을 다시 겹친다. 너 그런 식으로 부르지마. 이런 행동이 부추긴다는 걸 알기나 할지. 눈물에 짭짤해진 윗입술을 핥아주고 아플 정도로 콱 씹어줬더니 아윽, 소리를 내며 홱 떨어진다.
"아팟."
"너… 안 할거면 나 고문하지말고."
후아—, 괴로워 앓는 소리를 낸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꽈악 잡아 쥔다. 잠이나 자라. 한마디하고 좁은 침낭 안에서 몸을 뒤로 물린다. 침낭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다.
"추운데… ."
성감이 켜켜이 쌓여 아래가 펑 터질 것 같은 건 태섭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자 둘과 함께 사는 그 좁은 집에서 참아온 나날이 몇 년인데, 이 정도는 꽤 참을 만했던 거다. 그런 태섭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참아내는 대만이 또 다정하고 어딘가 더 야릇한 느낌이라 좋으니까. 대만이 멀어지며 살짝 식은 몸이 다시 홧홧해지는 걸 느끼며 대만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사람이 된 이의 안온한 품은 불 냄새가 나는구나.
"힘들어도 이러고 자요."
대답은 없다. 속으로 애국가라도 열창하는지 눈 감은 남자가 도로 멀어지지 않고 팔을 벌려 감싸온다. 적당히 힘이 들어간 두툼한 팔, 기분 좋은 압박감과 맵고 싸한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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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거의 동시에 일어난 두 사람은 온 얼굴이 퉁퉁 부어서 마주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특히 태섭은 눈이 심하게 부었다.
"송태섭 울보네."
좋아한다면서 엉엉 울기나 하고 말이야. 끅끅 웃으며 놀리는 웬수같은 연인에게 자기 직전에 라면 먹어서 그런거라고요! 왁왁 소리쳤다. 텐트를 뚫을 듯 힘껏 솟은 눈썹을 보고 또 한참을 웃고 머리를 북북 헝클이니 태섭의 작은 주먹이 대만의 명치에 꽂혔다. 텐트 한가운데에 엎드린 대만이 커헉, 소리를 낸 것과 거의 동시에 밖에서 바스락 거리는 발소리가 들려 태섭이 작은 야생동물처럼 경계한다.
"저기요~."
텐트 밖에서 부르는 소리는 분명 어제 들었던 그 언니라 불렸던 여자의 목소리다. 빠르게 태섭의 눈이 가늘어진다. 왜 또온거지.
"어제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건 아닌데 테이블 위에 두고갈게요~"
눈 밟는 소리가 멀리 가시자 아디다스 츄리닝의 대만이 먼저 텐트 밖으로 나간다. 둘다 잠든 새에 눈이 더 내려 하룻밤 새에 주변 풍경이 변했다. 북산 롱패딩은 그대로 두고 텐트 구석 박스 위에 놓인 대만의 패딩을 걸치고 따라 나온 태섭이 껌딱지처럼 대만의 등에 매달렸다.
"뭐예요?"
"주먹밥? 소고기도 있네."
"맛있겠다."
"아침부터 고기 가능해?"
"당연 가능하죠."
근데 불이 없는데. 태섭이 화롯대에 새하얗게 남은 잿더미를 불쏘시개로 툭, 툭 건들인다. 제일 안쪽에는 붉은 기운이 조금 남아 흰 연기가 피어오지만 불이 붙기에는 역시나 무리 아닐까.
"버너도 들고왔지."
"뭐라고… ."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만의 등에서 내려왔다. 진작 말하지 그럼 어제 냄비 안 태웠을텐데. 눈이 둥그렇게 쌓인 새카만 냄비는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도 가늠이 안간다. 대만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테이블과 의자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무심하게 말한다. 어차피 넌 똑같이 태웠을 걸.
"아니거든요?"
"맞거든. 분명 내가 저 여자들이랑 뭐라도 하는 줄 알고 백퍼 태웠을거야."
옆에서 입 꾹닫고 있던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진짜로 뭐했어요?"
대만이 들고온 또 다른 가방에서 가스 버너를 꺼내 불이 잘 들어오나 확인해본다. 가스가 얼었는 지 시원찮자 뒤돌아 태섭의 넉넉한 패딩 안에 넣어주고 태섭을 껴안는다. 씨익 웃으며 저를 둥기둥기 하는 남자를 올려다보면 재수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시야 한가득이다.
"글쎄다."
팟, 두 사람의 열기에 화력을 되찾은 불은 새파랗다. 금세 뜨거워진 팬 위에 빛깔 좋은 소고기가 치이익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 지난 밤에 날 고문한 벌이다. 어디 그 작은 머리통으로 생각해보라지. 뭘 했길래 이렇게 좋은 소고기를 주셨을까? 태섭이 옆에 바짝 붙어오며 주먹을 쥐어 보인다. 맞을래요? 어깨 위에 턱을 콱 꽂고 힘주는 녀석에게 적당히 익은 소고기를 먹여주며 달랜다. 남친 좀 그만 패.
'우리 집’이었던 돔텐트가 폴대를 제거하자마자 바닥에 푹삭 꺼진다. 이너텐트에 연결된 플라이를 걷어내고 바닥에 고정했던 팩도 제거하니 두 사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텐트와 물건을 차곡차곡 차에 싣고나니 정말 꿈같다. 대만이 태섭의 벨트를 대각선으로 끌고오다 아쉬워하는 낯빛을 힐긋 본다. 쪽, 입을 가볍게 맞춰주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는게 귀엽다. 지난 밤에는 먼저 달려들더니만. 귓바퀴를 살짝 씹고 '또 오자.' 속삭이니, 작은 머리가 끄덕인다.
"선배 시험 끝났으니까 이제 방학이죠?"
"응. 내일부터,"
"그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요?"
"엥?"
"송아라가 만석 닭강정도 사달라했고."
이게 발랑까져서는? 시동거는 소리에 태섭이 대만의 오른손을 끌어와 겹쳐 잡는다. 이상한 생각마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런 거니까.
"편의점 들려야겠네."
"왜요?"
"콘돔."
"변태냐고."
"진짜 변태가 뭔지 보여줘야겠네."
두사람이 탄 차가 새하얀 눈 밭 위를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태섭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대만도 손에 힘을 더한다.
"보여주던가요."
원래 작년 크리스마스를 위해 쓴 글이었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어요. 🥹🥹🥹
부디 즐거우셨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