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아, 생일 축하해 🎈
2026. 07. 대운동회 무료배포본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직장 생활.
모두를 행복하게 할 시간이라 하면 당연히 퇴근 시간일 것이오, 이 지옥을 버티게 할 시간이라 하면 점심시간일 것이다. 몇백 년 전 조선 시대에도 양반집 머슴, 노비들 밥은 잘멕여 키웠댔다. 21세기 현실이라 해서 다를 게 뭐 있겠나.
11시 45분.
영업 A팀의 정대만 팀장이 딸칵, 마우스를 옮겨가며 클릭한다. 그의 몇 안 되는 직장 내 루틴 중 하나다. 12시가 되기 15분 전, 더블클릭과 클릭이 딱 세 번 오가면 팀장의 점심시간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화면 한 가운데에 회사 메신저를 띄우고 조직도에 맞춰 분류된 채팅방을 훑다 보면 영업 B팀의 송태섭 대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늘은 별이 한 개?"
남자가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피식, 웃는다. 그 작은 소리에 오전 내내 고요했던 팀 내 분위기가 살짝 들뜬다. 모두의 눈길이 정 팀장의 뒤통수라던가, 옆통수라던가, 모니터라던가를 빠르게 스치다 흠, 하는 소리에 도로 제 자리의 모니터로 눈알들을 돌린다.
매일 같은 시각 정 팀장은 송태섭 대리의 프로필 사진을 본다. 정확히 말하면,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에 느른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송 대리의 사원증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그다음 페이지에 설정되어 있는 사진을 보는 것이지만....... 영업 A팀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더란다.
'드디어 우리 정 팀장이 업무 말고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태섭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린 프로필에서 대만이 사내 식당 메뉴 사진을 발견한 건 한 달 전쯤의 일이다.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했다는 메신저의 시스템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표로 설정해 둔 사진 하나는 프로필 사진이 되고 추가로 올리는 사진은 자신을 설명하는 일종의 bio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래미 사진으로 꾸며둘 그 두 번째 자리를 태섭은 사내 식당 메뉴로 꾸며두고 있던거다. 대리가 언제부터 시작한 건지는 모르나, 오전 9시 되면 태섭의 두 번째 사진은 점심과 저녁 메뉴로 업데이트된다.
식당 점심, 저녁 메뉴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각에 올리는 송태섭 대리도 희안하다만, 언제 업데이트가 되는지 태섭의 프로필 사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정대만 팀장은 참으로 집요하다.
영업 A팀 단체 회식 사진을 두 번째 사진으로 설정하고 단 한 번도 바꾼 적 없던 대만은 회의 일정을 확인하다 발견한 그 별난 사진에 첫 소감은 '대체 뭐야?' 였다. 잡곡밥, 미역국, 두부조림, 배추 김치? 그리고 라임색 형광펜 밑줄 하며 별표까지 정성스럽게 붙은 '치즈 닭갈비'에 알아차리게 된 거다.
이거, 점심 메뉴 잖아.
오늘은 소시지 야채 볶음에 커다랗게 별표가 붙었다. 생긴 건 한 성깔 하게 생겨서는, 입맛은 초딩이나 다름없다. 돈까스, 제육볶음, 보쌈, 볶음밥, 짜장밥 이런 메뉴에만 별표가 늘 가득했으니까.
왜인지는 모른다. 단순 호기심에 대만은 식당에서 태섭의 뒤를 쫓았던 적도 있었다. 태섭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대만은 그의 식판을 봤다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작은 덩치에 비해 뭘 그렇게 많이 먹는지, 흰 쌀밥 위에 제육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었다.
배식 줄에 나란히 같이 선 날에도 팀장은 제 어깨를 조금 넘는 남자를 힐긋 내려봤다. 태섭은 식당 직원들에게 이미 대식가로 유명한 것 같았다. 식판을 내민 송 대리에게 알아서 탕수육 두 그릇을 하나로 합쳐 올려놓는 걸 보니. 수북하게 쌓인 탕수육이 만족스러워 눈을 반짝이는 게 좀 귀여웠을지도.
어느 무더운 금요일 낮, 정 팀장의 "뭐야?" 하는 낯선 목소리에 영업 A팀 모두가 귀를 쫑긋거렸다. 궁금증 가득한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해 기웃거렸지만, 팀장의 모니터는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또 B팀의 송 대리 프로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으니까. 다만 팀장의 미간이 늘 봐왔던 것보다 십 일자로 좁아져 있어 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괜히 물어봤다가 팀장한테 붙잡혀서 소중한 점심시간을 날릴 순 없지 않나.
어쩐지 저기압 상태인 팀장의 눈치를 슬슬 보던 누구 하나가 '팀장님! 밥 먹고 오겠습니다'를 시전했고, 이어서 '저희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하더니 동시에 우르르 빠져나간다. 밥 먹으러 간다는 팀원들 목소리를 듣기나 했는지, 정 팀장은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광색 별표가 요란히도 붙어있던 태섭의 메뉴판이 잔잔하다 못해 창백한 수준이었다. 오늘 메뉴가 도대체, 뭐, 어떻길래? 대문짝만하게 'ㅠㅠ' 표시만 남겨둔단 말인가.

……흐음.
자세히보니 오이미역냉국 옆에는 x 표시가 하나, 가지나물 옆에는 x 표시가 두개 있다. 팀원들 나간다고 어수선한 것도 단 몇 분. 순식간에 조용해진 오피스에서 대만이 지갑과 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꿈치 아래까지 셔츠 소매를 걷은 남자는 홀로 걸어나왔다. 2층에 있는 사내 식당이 아닌, 영업 B팀의 자리로.
태섭은 우울했다.
식당 이모, 삼촌들에게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많고 많은 반찬 중에 하필, 가지나물이라니…….
보라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 없는 색깔로 흐물흐물 늘어지는 야채의 식감을 상상하니 더 우울해졌다. 삶은 달걀에 케챱만 뿌려져 있어도 맛있게 먹을텐데. 송 대리는 창가 밖을 한 번 내다보더니,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점심 메뉴가 싫어하는 반찬 뿐이어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배를 든든히 채워야 오후에 OO전자 상무님도 뵙고 일도 따낼테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열두시가 조금 지난 걸 확인한 태섭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 끝 코너를 돌던 때였다. 마찬가지로 코너를 돌던 키 큰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합……."
"아. 잘됐네."
"?"
당장 부딪힌 코가 얼얼하게 아픈데, 잘됐다는 말에 눈썹 하나가 절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 송태섭이가 누구던가. 영업 B팀에 신입으로 입사, 사수도 없는 말단부터 시작해 착실히 성장해 누구보다 빠르게 대리를 단 송태섭 아니던가. 그러나 어찌되었건 여기는 회사고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회 생활부터 해야, 방해받지 않겠지.
음, 이 정도로 키 큰 사람이라면 일단 우리 팀 사람은 아니고……. 부딪혀 놓고 사과도 없이 반말부터 하는 잘난 면상을 고개들어 확인하기 전에, 태섭은 눈앞의 흰 셔츠 위 가지런히 놓인 사원증부터 빠르게 훑었다.
'정대만'
정대만? 영업 A팀의…… 그 정대만 팀장?
입사하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 해본 적도 없는 양반이 왜, 여기에? 어리둥절한 태섭의 머릿속을 알리 없는 대만은 계속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송 대리 돈까스 좋아하지?"
"네?"
"사줄테니까 가자."
"......네?"
정신차려보니 태섭은 대만의 차에 아주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뭐지? 나한테 돈까스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나? 근데 왜 차를 탄거지. 제멋대로 인 것도 정도가 있지 않나? 게다가 돈까스를 먹을거라면 회사 코앞에 전문점이 두 군데나 있는데? 혹시 이대로 어디 이상한 곳에 끌려가는 건 아닐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돈까스 사준다는 말로 어린애를 속여 병원에 데려간다는.
게다가, 애초에 태섭은 좋다고, 가겠다고 답한 적도 없는데.
시동걸린 차는 회사를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더니 막힘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인에게 주어진 점심시간은 단 한시간 뿐인데,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딜 가는거지.
'혹시 영업 A팀에 잘못한게 있던가?'
지난 미팅 때 일정이 늘어지는 감이 있다고, 정 팀장 앞에서 솔직히 피드백했던 게 문제였나, 아니면 영업 A팀의 김OO 사원한테 따로 부탁했던 일이 틀어졌나.
"정 팀장님."
"송 대리."
동시에 서로를 불렀고, 불린 호칭대로 태섭은 대만에게 순서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오늘 점심 메뉴가 그렇게 싫었냐고, 물어보려 했어."
엥.
이게 무슨 말이지.
"점심 메뉴요?"
"왜. 회사 메신저 프로필 사진 매일 바꾸잖아."
ㅇㅏ,
으아!!!!!?
운전하는 남자의 옆 얼굴을 두 눈 크게 뜨고, 뜨악하고 바라봤다. 정 팀장은 뭐가 그렇게 좋은 지 입꼬리를 올리고 실실 웃었다. 오르막 길을 부드럽게 오르던 팀장의 차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았다. 이내 후진 주차까지 깔끔하게 마치고는 멈춰섰다.
"오늘은 울고 있길래."
먼저 차에서 내리는 대만의 등을 쫓기 전에, 태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걸 볼 사람이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있다 하더라도 저랑 비슷한 직급 정도인게 정상 아닌가?
정 팀장의 말을 곱씹어보면 태섭이 매일 오전 업데이트하는 것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오늘은 울고 있길래' 라는 정 팀장의 말은 즉 '송 대리가 가지나물에 엉엉 울고 있길래 맛있는 돈까스 사주려고 여기까지 왔어' 라는 말이 된다.
그럼 '여기까지'의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태섭은 처음 와봤지만 어디인지는 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새파란 하늘과 산, 그 사이로 떡하니 우뚝 솟은 랜드마크를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
도대체가……! 옆 팀 직원 돈까스 사준다고 서울 중구 남산까지 오는 팀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온갖 예능, 여러 요리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남산왕돈까스 집은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운 좋게도 딱 한 테이블이 남아있었고 식당에서 유일하게 셔츠 차림인 두 남자는 마주보고 앉았다.
"그래서 송 대리가 나한테 할 말은 뭐야?"
가게의 단일 메뉴인 정식 세트가 포스기에 찍히자마자 대만이 물었다. 처음에는 '제가 팀장님께 잘못한 게 있나요?' 하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질문이 그렇게 중요치 않음을 태섭은 알았다. 언제부터 그걸 보고 있었던 건지, 왜 하필 돈까스인지, 그리고 왜 남산까지 와야 하는건지. 물어 볼 게 한 두 가지가 아녔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제일 궁금한 것부터 기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뜨거웠다. 어쩐지 낯뜨거운 태섭의 질문에도 대만은 여유로웠다. 긴 팔을 뻗어 엎어진 종이컵 두개를 꺼내 뒤집었다. 이어서 물 따르는 대만의 손을 따라 태섭은 테이블 서랍에서 포크, 나이프를 꺼내 가지런히 올렸다.
"아마, 지난번에 영업팀 전체 회의 잡으려고 영업 B팀 조직도 보다가?"
"……."
"보통 없거나 애기들 사진인데, 송 대리는 꽤 독특하잖아."
태섭이 대꾸 없이 입술만 꾸욱 오므리자, 왜? 혹시 왕돈까스 싫어해? 묻고서 옆 의자에 팔을 걸친 편한 자세로 태섭을 바라본다.
"아뇨. ……좋아해요."
"입맛이 거의 초딩이던데."
"초딩?"
버릇대로 또 눈썹을 씰룩 거리자 대만이 훗, 또 웃는다. 짜증나게 잘생긴 저 얼굴만 아녔, 아니. 팀장만 아녔어도 뭐라 한마디할텐데.
"그렇다고 돈까스 먹으러 여기까지 오는 건 좀……."
"1시까지만 들어가면 되잖아. 더 늦으면 나랑 상담했다고 대충 둘러대."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이 인간아.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점심. 서울 유명 관광지 코앞 맛집에 셔츠 입은 직장인은 우리 둘 뿐이라고. 주변을 둘러봐도 연인, 외국인, 아니면 가족 단위의 손님들 밖에 없잖아. 그리고 우리 팀장이 당신이랑 상담했다고 하면 잘도 그냥 넘어가겠다. 또 따져 물을 게 한 두 가지가 아녔지만 태섭은 다 꿀꺽 삼켰다.
"여기 맛있어."
"예에."
"전에 사귀던 애가 좋아했거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는 남자를 태섭이 올려다봤다. 정대만 팀장. 일처리가 기막히다고 들었는데, 그냥 다 헛소문이었던게 아닐까? 아니지, 영업의 영역에서 보면 이런 것도 다 기술이고 능력이라 할 수 있을지도……. 타이밍 좋게 정식 세트를 들고와주신 사장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태섭은 '잘 먹겠습니다.' 딱 한 마디만 했다.
정 팀장의 말대로 돈까스는 맛있었다. 크기가 태섭의 얼굴보다도 큼지막 한데도 바삭바삭하고 고소했다. 뿌려진 소스도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달달해서 좋았다. 정식이라 함께 나온 새우 튀김과 생선까스도 훌륭했고. 크림스프와 마카로니 샐러드도 익숙한 맛이었다.
배가 불러오니, 태섭은 대만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맛 없는 반찬에 울고 있네? 우는 애 돈까스나 사줘야겠군. 딱 이 정도. 회사 후배를 향한 단순한 친절이겠거니 하고.
물론 그런 친절이 친하지도 않은 옆 팀 사람에게도 포함되는 건지, 그런 사람을 전 애인이랑 왔던 음식점에 데리고 와도 되는 건지……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여전히 있었지만.
다행히, 돈까스 사건(태섭은 그 날을 이렇게 불렀다) 이후에도 태섭의 프로필 두번째 사진은 계속 업데이트 됐다. 하지말까 싶었으나, 나 때문에 안하는 거냐고 정대만이 물어올 게 뻔했다. 그런 요상한 대화를 정 팀장과 굳이 사내에서 나눌 이유는 없다. 차라리, 그래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다만 별표라던가 눈물, x 표시는 없어졌다. 라임색 형관펜을 드는 순간 정 팀장의 그 얼굴이 떠오르는 바람에……. '오늘은 울고 있길래' 하던 목소리도 함께 귓가를 왱왱 맴돌고 말이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태섭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속한 영업 B팀의 팀장보다도 옆팀 팀장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거다.
심란해진 마음이 바쁜 일 더미 속으로 묻히기도 전에 영업 B팀에 사고가 터졌다. 지난 봄에 대규모로 진행했던 계약 두 건이 연달아 터져버린 어마무시한 일이었다. 영업본부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었으나, 영업 B팀 팀장은 책임 지기는 커녕 팀 내에서 일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겠다며 성을 냈다.
그리고 하필 그 화살이 전부 송태섭 대리를 향했다.
관리를 어떻게 한거냐, 제대로 컨디션 파악은 한거냐. 대부분 팀장 자신이 확인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계약 두 건 전부 태섭이 함께 진행했다는 이유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송 대리를 불러다가 면전에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해결 못하겠으면 책임지고 나가던가, 식의 협박까지 나왔으니.
일명 꼬리자르기.
부조리함 앞에 태섭은 말문이 막혔으나, 섣불리 답하기보다 팀장 놈이 씨부리는 말이란 말은 전부 녹음했다.
후……,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처리했다. 다행일까, 이런 처사는 말도 안된다며 팀원들이 조금씩 태섭을 도왔다.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거,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으나 직접 거래처에 찾아가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담당자에게 상황을 알아보는 등 정말 낮밤을 가리지 않고 개처럼 일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정대만 팀장의 귀까지 다다르는 데에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전부터 일이 틀어지면 이런 식으로 처리하던 B팀 팀장이었다. 책임의 규모가 클 수록 누구 하나는 쥐어 짜며 괴롭히다 결국 퇴사하게 만들기로 악명 높은 인간.
"이번에는 송 대리라며?"
영업 A팀 내에도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째 업데이트 되지 않는 태섭의 프로필에 대만도 짐작을 넘어 확신하고 있었다. 정적인 태섭의 사원증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가만히 바라만 보던 정 팀장이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가늘게 눈을 떴다.
— 송 대리, 점심 같이 먹을래?
태섭에게 처음으로 보낸 1:1 메시지는 서너 시간이 지나도 '읽음' 표시가 생기지 않았다. 그날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답장이 왔는데, 대만은 거기서 또 미간을 좁혔다.
— 죄송해요. 오전에 외근 나갔다가 이제 복귀하느라…….
— 곧 8시인데, 바로 퇴근 안하고?
— 일이 많아서요.
퇴근하려던 대만은 생각을 바꿨다.
가방을 챙겨 옆팀을 향해 걸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 오피스로 이동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영업 B팀의 팀장을 마주쳤다. 대만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됐다. 일은 송 대리한테 다 던져두고 자기는 퇴근한다 이거지.
"최 팀장님."
"아, 난 또 누구라고 정 팀장, 오랜만이네."
"요즘 B팀에 일이 많다던데."
"우리가 일이 없던 때가 있나?"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습에 대만도 더는 말 붙이지 않았다. 고약한 성질 만큼 배는 나오고 경력은 쌓여가는데 팀장 이상으로 진급도 못한 무능력자. 싸늘해진 시선으로 닫힌 엘리베이터를 한 번 더 본 대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B팀에는 태섭 홀로 남아 일하고 있었다. 대만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화면에 띄운 엑셀 시트와 프린트를 비교해가며 확인하고 있었다. 꼼꼼한 일처리가 장점이라는 건 팀원들 통해서 일찍이 들었던 점이다. A팀에 TO가 남았다면 진작에 뺏어 왔을텐데.
가만히 태섭의 뒤에서 바라보던 대만이 엑셀 최상단에 고정된 셀 위를 검지로 짚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람에 태섭이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바로 코 앞에 대만의 얼굴이 있어 한 번 더 놀랐다. 상체를 뒤로 기울여 피하자 대만이 더 가까이 붙었다.
"여기 업체 다른 데로 바꿔."
"저, 정 팀장님?"
"응. 정 팀장님."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라고. 왜 여기에 있느냐는 질문이잖아. 태섭이 대만의 시선을 최대한 무시한 채 모니터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저녁은?"
"아직요."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다줄까?"
"이거, 조금만 더 하면 돼요."
"흠, 그럼 도와줄까?"
도와준다고? 태섭의 눈이 아주 찰나로 반짝였다. 아마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기운나는 말일거라. 그러나 그 도움 줄 상대가 영 혼란스러운 사람이다. 생각치도 못했던 대만의 등장에 또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니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고맙긴한데, 도대체 왜?
정 팀장은 왜 잘해주는거지?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도와주시면 이번엔 제가 밥 살게요."
스스로를 이상하다 생각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특히 회사에서는 이런 뜻 모를 관심이나 친절, 정중히 거절하고 악착같이 혼자 해결하겠다며 덤벼들었을텐데.
가방을 태섭의 옆자리에 내려놓은 대만이 빈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옆에 앉자, 척추가 어째 가지런해지는 느낌이다. 회사로 돌아오며 사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쫍, 빨았다. 얼음은 다 녹아 미지근해진 커피의 씁쓸한 맛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괜한 우려였을까.
대만은 정말…로 일만 도왔다.
이전에 영업 A팀에서 같은 거래처를 맡았을 때 어떻게 일을 진행했었는지 기록도 따로 보내줬다. 태섭이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 팀장이 직접 전화해 양해를 구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통화가 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아, 이래서 직급이 있는거 구나. 일개 사원이나 대리 급 선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프로세스라 뭐라 할 말도 없었다.
태섭이 눈을 데구르 굴려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 30분. 정 팀장의 도움 덕에 태섭이 며칠간 해야 할 일이 풀려있었다. 계약 두 건 전부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도 둘 중 한 곳은 계약 재검토를 진행하겠다고 했고, 규모는 작아도 다른 거래처와 연결이 가능 할 것 같았다. 대만의 지갑에서 나온 두 장의 거래처 명함까지 받아든 태섭은 직감했다.
새카만 속내까지는 아녀도 분명 원하는 게 있겠구나, 하고.
"이제 밥 먹으러 갈까."
11시가 넘었으니 그냥 퇴근하자고 할 법도 한데, 정 팀장은 배에 손을 얹고 말한다. 그 뻔뻔함에 어이가 없는데도, 태섭의 입에서는 픽 웃음만 샜다.
모든 오피스 층에 불이 꺼져 어둑해진 복도를 둘이서 빠져나간다. 모두가 퇴근해 아무도 없는 회사, 마치 세상에 두사람만 남은 것 같다. 조용함을 넘어선 적막함에 두 사람 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키가 작은 태섭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걷는 정 팀장이라는 남자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해져서, 태섭은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살짝 씹었다.
건물을 빠져 나오자 더운 밤공기에 압도된다. 태섭은 대만을 데리고 회사 근처 노포를 찾았다. 앉자마자 주문한 메뉴는 태섭이 올 때마다 먹었던 제육볶음에 계란말이. 자정이 다되어가도 어찌되었든 '저녁'이니까, 밥 두공기도 추가했더니 대만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낸다. '사장님, 소주 꺼내갈게요.' 단골들이나 보일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에 태섭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이 시간에 식사만 주문하고 술 안마시면 욕 먹어."
태섭의 눈동자가 초록색 병의 뚜껑에 고정됐다. 빨뚜. 뭐 간단히 술 걸치는 건 좋은데, 중에 독한걸 골라온 이유는…… 역시나 잘 모르겠다. 술은 아직 한 모금도 안했는데, 정신이 금새 알딸딸해진다.
실은 어쩌면……,
난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싶은 건 아닐까.
소주잔 가득 꼴꼴꼴 차오르는 투명한 액체를 입 속으로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식도부터 뜨끈한 반응이 타고 올라 왔지만 태섭은 크—, 하는 소리도 안냈다. 둥그런 철판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정 팀장이 잘 마시네, 중얼거리는 건 무시하고 그의 술잔에도 아주 한가득 따랐다.
"정 팀장님은 이상해요."
고작 참이슬 빨뚜 한 잔에 취할리는 없는데, 태섭은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뭐가?"
"왜 잘해줘요?"
"내가 잘해줬어?"
"솔직히 옆팀 사람이면 남 아닌가요? 그런데 잘해주잖아요."
제 잔을 스스로 채우고 또 한 입에 털어내고. 두 번째 잔부터는 으, 하는 소리가 절로났다. 귓속과 눈가가 뜨거워지는걸 느끼며 대만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왼 입꼬리만 은근히 올린 입이 열렸을 때, 매콤하게 볶아진 제육에 케챱 뿌려진 계란말이가 나왔다.
답하려던 건 잊었는지, 대만은 태섭의 앞접시에 제일 큼지막한 계란말이부터 덜어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슬포슬 샛노란 자태에 태섭이 젓가락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고 있으니, 그제서야 대만이 말한다.
"송 대리가 그렇게 느끼면 맞겠지."
"이유는요."
대만의 소주잔이 절반 조금 안되게 비었다. 더 따라주기도 애매한 정도로. 태섭은 정 팀장의 잔이 야비하다는 듯 노려보다 세 번째, 네 번째 잔을 연속으로 비웠다.
"신경쓰이니까?"
"신경쓰이면 차타고 나가서 남산왕돈까스 사주고, 막, 맘대로 옆 팀 일 도와주나요?"
"그래."
"……그으거 진짜아……"
이상한건데. 이상하다고요.
그런 말, 마치 정 팀장이 나를 조, 조… 좋…….
태섭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소주병을 마저 비웠다.
제육 한 접시가 사라질 때 쯤 두 번째 소주병도 싹 동이났다. 집 떠나 9시에 출근하고 14시간 가까이 밖에 있던거나 다름 없었으니 세팅했던 머리가 이마 위로 축 늘어졌다. 가게 에어컨 바람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소주 세 병도 거뜬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쉽게 취했지, 이것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취에 몽롱 느슨해진 눈빛으로 정대만의 두 눈만 바라보던 갈색 눈동자가 느리게 감겼다.
3.
태섭을 등에 엎고 대만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같이 술을 마셨으니, 운전은 할 수 없다. 처음에는 바로 모텔에 들어갈까 하다, 귀 끝까지 시벌게져서는 '정 팀장님, ……나, ……나 조아해요?' 웅얼거리며 잠들어버린 송 대리가 소중스러워져서 그만뒀다. 일 처리도 꼼꼼한데 눈치 빠르고 귀엽기까지 하면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 없다.
대만의 사원증이 수면실 문을 잠금 해제했다. 다행히 바쁜 시기가 지나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수면실 제일 안쪽 침대에 태섭을 눕히고 그 옆에 대만도 누웠다.
구석에 놓인 수면등을 켜 새액새액 잠든 앳된 얼굴을 한 참 내려다보다 볼을 쿡 찔렀다. 연이은 야근에 피곤했을텐데 술까지 그렇게 들이 마셨으니 그대로 잠들었나보다. 늘 새침하게 반응하던 눈썹도 얌전했다.
"무방비하네, 송 대리."
이불을 태섭의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꼭 오늘이 아녀도 기회는 많다. 다음에는 수면실이 아니라 송 대리의 집이거나 내 집에 들어 갈거다. 그런 기회가 아니더라도 지방 출장에 같이 가면 어쩔 수 없이 호텔에 갈테니, 뭐—.
"으응……."
짧게 앓는 소리를 낸 태섭이 뒤척이다 대만의 가슴팍에 볼을 기대더니 다시 얌전해졌다. 참으려던 게 무색하게, 하는 수 없이 대만은 고개 숙여 태섭의 이마에 입맞췄다.
내일은 사내 식당 점심 메뉴로 무엇이 나오든, 콩나물 해장국 집에 데리고 가야겠다. 그래야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일단 용서 받을테니까.